법흥왕 (法興王 ?~54)은 신라의 제23대 왕(514~540 재위)이였다. 이름은 원종(原宗), 아버지는 지증왕이고, 어머니는 연제 부인(延帝夫人)이다. 지증왕의 원자로 왕위에 올랐고 왕비는 보도 부인 박씨이다. 그는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법흥왕은 지증왕때의 중앙집권체제를 그대로 수용하여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꽤했다. 나라의 중흥을 위해 불교를 수용한 개혁군주로 지금 발견된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있는데 법흥왕의 본명이 모진(慕秦)이었던 것이다. 법흥왕의 이름이 '모진/모직' 이라는 것은 중국측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의 금석문(울진봉평비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니만큼 틀림이 없다.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즉위하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 정상화하였다. 517년 처음으로 병부(병부)를 설치하였다. 520년 율령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공복)제정하였다.
법흥왕 (法興王 ?~54)은 신라의 제23대 왕(514~540 재위)이였다. 이름은 원종(原宗), 아버지는 지증왕이고, 어머니는 연제 부인(延帝夫人)이다. 지증왕의 원자로 왕위에 올랐고 왕비는 보도 부인 박씨이다. 그는 키가 7척이나 되고 마음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법흥왕은 지증왕때의 중앙집권체제를 그대로 수용하여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꽤했다. 나라의 중흥을 위해 불교를 수용한 개혁군주로 지금 발견된 그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있는데 법흥왕의 본명이 모진(慕秦)이었던 것이다. 법흥왕의 이름이 '모진/모직' 이라는 것은 중국측 기록에서뿐만 아니라 국내의 금석문(울진봉평비 등)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니만큼 틀림이 없다. 법흥왕의 본명은 慕秦(모진)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즉위하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국교 정상화하였다. 517년 처음으로 병부(병부)를 설치하였다. 520년 율령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공복)제정하였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옥진 궁주는 위화랑의 장녀로 출생하여, 처음에는 박영실(朴英失, 지증왕의 외손)과 결혼했으나, 곧 법흥왕의 총애를 받아 궁주(宮主)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