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 설치(四郡)는 압록강 유역을 개척한 것이다. 세종 대왕은 단순히 한글을 창제하고 용비어천가를 지은 언어 지도자에 그치지 않았다. 육진 개척과 사군 설치로 국방을 키웠고 토지와 세제개혁, 과학기술 육성 등으로 국태민안의 위상을 높였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육진, 사군을 설치한 것은 백성들이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고려는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들을 군사적으로 널리 활용하기 위해 화기 운용 부대인 화통방사군도 설치하였다. 나아가 해전에서의 화포 활용을 위해 누선(樓船)이라는 하는 새로운 전함도 건조하였다.
사군 설치(四郡)는 압록강 유역을 개척한 것이다. 세종 대왕은 단순히 한글을 창제하고 용비어천가를 지은 언어 지도자에 그치지 않았다. 육진 개척과 사군 설치로 국방을 키웠고 토지와 세제개혁, 과학기술 육성 등으로 국태민안의 위상을 높였다. 대마도를 정벌하고 육진, 사군을 설치한 것은 백성들이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사군이란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 요지인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의 4군을 말한다. 서북 방면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經略)은 고려 말에 상당한 진척을 보여 강 하류인 서북방면은 거의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개척은 더욱 진척되어, 태종 16년(1416) 지금의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지금의 慈城郡 閭延面)을 설치함으로써 4군의 설치가 비롯되었다. 세종 때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15년(1433)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無)로 삼아 황해도·평안도의 병사 1만 5000여 명으로 이를 정벌케 하여, 강계부와 여연군의 중간 지역인 자작(慈作:慈城)에 성을 쌓고 자성군을 설치하였다. 세종 22년(1440) 여연군 동방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세종 24년(1442) 군으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여연·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虞芮堡)에 우예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사군의 설치를 보게 되어 동북의 육진(六鎭)과 아울러 조선의 북경(北境)은 두만강·압록강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고려는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들을 군사적으로 널리 활용하기 위해 화기 운용 부대인 화통방사군도 설치하였다. 나아가 해전에서의 화포 활용을 위해 누선(樓船)이라는 하는 새로운 전함도 건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