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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핀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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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핀 3세는 소피핀. 피핀 단구왕이라고도 한다. 741년 아버지 샤를 마르텔 사망 후 형 카를만과 함께 각각 아우스트라시아 ·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다. 743년 잠시 궐위 되었던 왕위를 힐데리히 3세를 영입하여 오르게 하였으나 실권은 그들 두 형제가 장악하였으며, 747년 형이 은퇴한 뒤 전왕국의 궁재로서 실권을 휘둘렀습니다. 751년 교회 유력자의 추대와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받아 힐데리히 3세를 폐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왕조를 개막하였습니다. 주교 보니파티우스를 원조하여 라인 동쪽 지방의 그리스도교 포교를 촉진하는 한편, 수차에 걸쳐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가신에 대한 봉토 수여 문제로 교회 소유 영지의 몰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였습니다. 754년에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고 중부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과 펜타폴리스를 교황에게 기진하여 교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으며, 이로써 교황령이 공인되었습니다. 또한, 바이에른을 공략하여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 피핀 3세 [ Pippin III,(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파리까지 진격하였던 이슬람 군대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패배한 뒤 북상을 멈추었다. 이베리아의 서고트 영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영지를 인정받거나 멸망하였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큰아들은 아우스트라시아·알레마니아·튀링겐의 궁재인 카를로만 이고, 둘째 아들이 바로 피핀 3세로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프로방스의 궁재였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분류:프랑크 왕국의 왕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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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핀 3세는 소피핀. 피핀 단구왕이라고도 한다. 741년 아버지 샤를 마르텔 사망 후 형 카를만과 함께 각각 아우스트라시아 ·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다. 743년 잠시 궐위 되었던 왕위를 힐데리히 3세를 영입하여 오르게 하였으나 실권은 그들 두 형제가 장악하였으며, 747년 형이 은퇴한 뒤 전왕국의 궁재로서 실권을 휘둘렀습니다. 751년 교회 유력자의 추대와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받아 힐데리히 3세를 폐하고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왕조를 개막하였습니다. 주교 보니파티우스를 원조하여 라인 동쪽 지방의 그리스도교 포교를 촉진하는 한편, 수차에 걸쳐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가신에 대한 봉토 수여 문제로 교회 소유 영지의 몰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였습니다. 754년에는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고 중부 이탈리아의 라벤나 지방과 펜타폴리스를 교황에게 기진하여 교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으며, 이로써 교황령이 공인되었습니다. 또한, 바이에른을 공략하여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 피핀 3세 [ Pippin III,(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파리까지 진격하였던 이슬람 군대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패배한 뒤 북상을 멈추었다. 이베리아의 서고트 영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영지를 인정받거나 멸망하였다.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큰아들은 아우스트라시아·알레마니아·튀링겐의 궁재인 카를로만 이고, 둘째 아들이 바로 피핀 3세로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프로방스의 궁재였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실권을 잃었고, 권력은 점차 백작들과 다른 세력가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본래는 왕실의 살림을 맡는 관직이었던 궁재(宮宰)가 점점 왕보다도 세력이 커져 섭정이나 부왕에 맞먹는 지위에 해당하게 되었다. 그러한 궁재들 가운데 부유한 가문 출신인 란덴의 피핀(피핀 1세)은 특히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가문의 후손으로 741년에 죽은 카를 마르텔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우스트라시아·알레마니아·튀링겐의 궁재인 카를로만이고, 둘째 아들이 바로 피핀 3세로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프로방스의 궁재였다. 737년 이후 프랑크 왕국 전역을 다스린 왕은 없었으나 메로빙거 왕조의 종주권만은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두 형제는 743년 힐데리히 3세에게 왕관을 씌웠다. 카를의 셋째 아들 그리포는 그의 정부였던 듯한 바이에른 고위 가문 출신 여인이 낳은 아들로, 741년 형들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었을 때 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후 수년 동안 많은 반란을 지휘해 몇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나 결국 753년 프랑크와 적대하고 있던 롬바르드족과 합류하기 위해 가던 도중 알프스 산길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롬바르드족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 공동의 적이었다. 그밖에도 742년 아키텐과 알레만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743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가 전투를 벌였다. 744년에는 작센이, 그뒤에는 아키텐(745)과 알레만니아(746)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747년 카를로만이 수년 간 생각한 끝에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자 피핀은 프랑크의 단독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야심을 갖고 있어 궁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어 프랑크족을 다스리고 싶어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던 반면 아버지와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긴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750년 그는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사절 2명을 보내 편지로 이렇게 질문했다. "다스릴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왕을 모시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입니까?" 교황은 "통치능력이 있는 왕을 갖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마 교황의 권위로써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라는 대답을 보냈다. 결국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으로 보내졌으며, 피핀은 751년 11월 수아송에서 보니파키우스 대주교와 몇몇 성직자들에 의해 왕으로 축성받았다. 당시 교황청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롬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는 총주교대리령으로 알려진 라벤나와 그 주위 영토를 장악했고 롬바르드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해 로마를 포위하고 함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752년 자카리아스가 죽은 뒤 교황의 자리에 오른 스테파누스 2세는 753년 11월 험한 산길을 지나 프랑크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754년 여름까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 머무르면서 피핀과 그의 아들인 카를(샤를마뉴)과 카를로만을 각각 왕과 후계자로서 축성해주었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으며 알프스에서 아이스툴프가 거느리는 롬바르드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이스툴프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로 도망치자 피핀의 군대는 파비아 주변의 땅을 약탈했다. 결국 아이스툴프는 라벤나와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재산과 라벤나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때 피핀은 물러갔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교황은 수차례에 걸쳐 피핀에게 자신의 고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피핀은 756년 다시 이탈리아에 왔고, 아이스툴프는 다시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756) 757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롬바르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같은 해 스테파누스도 죽었고, 새로 교황에 선출된 파울루스 1세는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피핀에게 계속 도움을 구하는 서신을 냈다. 그러나 피핀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748, 753년에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과 749년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해야만 하는 한편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던 아키텐에도 진격해야만 했다. 피핀은 768년 아키텐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드니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창시자로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의 강력한 후원자였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교황의 권리 주장은 피핀이 아이스툴프와 싸운 뒤 아이스툴프가 로마 주위의 영토를 반환한다고 서약한 데서 비롯된다. 피핀은 프랑크 왕국 내에 대주교령(大主敎領) 설치를 원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종교회의를 장려하고 신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는데, 이런 사실들은 그가 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분류:프랑크 왕국의 왕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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