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Aleksey, (영) Alexis. 정식 이름은 Aleksey Mikhaylovich. 1629. 3. 19(구력 3. 9) 모스크바~ 1676. 2. 8(구력 1. 29)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차르(1645~76 재위)이다. 로마노프 왕가의 창시자 미하일 로마노프(1613~45 재위)의 아들이며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가정교사 보리스 이바노비치 모로조프에게 교육 받았으나 그리 깊이있는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매부이기도 했던 모로조프는 처음에는 국정에 참여했으나 1648년 모스크바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알렉세이는 그를 추방해야만 했다. 알렉세이는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1649년 새로운 러시아 법전(Sobornoye Ulozheniye)을 만들어냈으며 이 법전은 농노제를 합법적으로 규정했다. 궁정 총신으로서 모로조프의 뒤를 이어 N. I. 오도예프스키 공이, 그다음에는 총주교 니콘이 부상했다. 1654년 1월 러시아는 드네르프카자크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받아들였고 이어 5월에는 폴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에 들어갔다. 이 전쟁은 또한 스웨덴과의 분쟁(1656~61)도 수반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종결한 1667년 1월의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드네프르 강 동쪽에 위치한 스몰렌스크·키예프·우크라이나를 획득했다.
알렉세이 [Aleksey, (영) Alexis. 정식 이름은 Aleksey Mikhaylovich. 1629. 3. 19(구력 3. 9) 모스크바~ 1676. 2. 8(구력 1. 29)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차르(1645~76 재위)이다. 로마노프 왕가의 창시자 미하일 로마노프(1613~45 재위)의 아들이며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가정교사 보리스 이바노비치 모로조프에게 교육 받았으나 그리 깊이있는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매부이기도 했던 모로조프는 처음에는 국정에 참여했으나 1648년 모스크바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알렉세이는 그를 추방해야만 했다. 알렉세이는 반란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를 소집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1649년 새로운 러시아 법전(Sobornoye Ulozheniye)을 만들어냈으며 이 법전은 농노제를 합법적으로 규정했다. 궁정 총신으로서 모로조프의 뒤를 이어 N. I. 오도예프스키 공이, 그다음에는 총주교 니콘이 부상했다. 1654년 1월 러시아는 드네르프카자크족들에 대한 지배권을 받아들였고 이어 5월에는 폴란드와의 기나긴 전쟁에 들어갔다. 이 전쟁은 또한 스웨덴과의 분쟁(1656~61)도 수반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종결한 1667년 1월의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드네프르 강 동쪽에 위치한 스몰렌스크·키예프·우크라이나를 획득했다. 알렉세이의 통치 시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 일을 든다면 러시아 정교회의 분열이었다. 그는 수세기 동안 내려오면서 그리스적인 원형에서 이탈한 러시아 예배의식서와 실제 의식을 개혁하려던 니콘의 노력을 지지했다. 급한 성미와 권위주의적인 성향 때문에 주위에 많은 적을 만들었던 니콘과는 오래 전에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니콘이 주도한 개혁은 시행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파문당했다. 니콘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후에는 A. L. 오르딘 나시초킨이 황제의 주요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1671년에는 A. S. 마트베예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알렉세이의 통치 시기에 농민은 토지와 영주에 예속된 존재였으며 이때문에 결국 농노로 전락하는 형편이었다. 전국회의는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대신 전문 관료와 정규군이 중요한 위치로 부상했다. 알렉세이는 유럽과의 통상을 장려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받은 외국으로부터의 영향은 지금까지 러시아를 유럽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차단시켰던 상당히 견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통치에 대한 불만은 외국 세력과의 경제적인 경쟁에 시달리는 도시와 마지막 남은 자유의 흔적마저 박탈당한 농민층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의 정도는 빈번한 반란으로 표출되었는데 그중 가장 격렬했던 것은 1667~71년 동부 국경지대에서 일어난 스텐카 라진이 이끄는 농민반란이었다. 실제로 알렉세이가 온순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기있는 통치자였다는 것은 모든 사료에 똑같이 나타난다. 러시아의 당시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는 박식했으며 서양의 기술·통상·문화·군사학 등에 깊이있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의 커다란 결점은 몸이 허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통치 전반에 걸쳐 나라일을 총신들에게 맡겼는데 이들 중에는 무능력하거나 완전한 멍청이들도 있었다. 그는 2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마리아 일리니슈나 밀로슬라프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2명의 아들과 몇 명의 딸을 낳았다. 두 아들은 후일 모두 황제가 된 표도르와 이반이었다. 그다음엔 나탈리아 키릴로프나 나리슈키나와 결혼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은 훗날 표트르 대제가 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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