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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덕양 거란이 세운 요(遼)에서 태후로서 최대의 권력과 사랑까지 누린 사람은 승천태후 소연연(蕭燕燕)이었다. 그녀의 시대에 최고 권력은 한족 출신 한덕양(韓德讓)이 차지했다. 둘 사이가 연인이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함께 거란의 최전성기를 만들었으니 탓할 필요는 없다. 소연연의 아버지 소사온(蕭思溫)은 중국화된 거란의 귀족으로 학문이 매우 높았다. 소연연은 남달리 총명하고 고집스러운 소녀였다. 소사온은 딸을 한족출신 관리로 유명했던 한지고(韓知古)의 손자 한덕양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다. 한덕양은 집안의 영향으로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략에도 뛰어난 당대 최고의 젊은이였다. 969년에 목종(穆宗)이 피살되자 소사온이 세종의 차남 야율현(耶律賢)을 경종(景宗)으로 옹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야율현은 17세의 소연연을 귀비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979년, 송(宋)이 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북경인 요의 남경을 지키던 한덕양이 고량하(高梁河)에서 송군을 대파했다. 한덕양이 명성을 널리 떨쳤다. 982년, 죽음을 앞둔 경종은 야율융서(耶律隆緖)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군국대사를 황후의 명으로 처리하라는 조칙을 반포했다. 소연연은 한덕양을 남원추밀사로 추천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시집을 가기로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황상께서 하늘로 돌아가시게 되었으니, 당신과 지난 정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라를 맡게 된 내 어린 아들을 당신의 아들처럼 여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요는 남북 양원(兩院)을 설치했다. 북원은 거란을 비롯한 유목민족, 남원은 한족에 관한 사무를 처리했다. 양원의 추밀사를 겸직한 경우는 한덕양이 유일했다. 대승상까지 겸임한 그는 황제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권력자였다. 소태후는 야율융운(耶律隆運)이라는 성과 이름까지 하사했다. 태후의 연인이라는 소문에 걸맞게 진왕(晋王)으로 봉해지기도 했다. 한덕양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자, 거란의 귀족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거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이처럼 중임을 맡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항의했다. 소후는 유능한 사람을 골라서 적절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 당연한데, 출신 종족은 왜 거론하느냐고 일축했다. 한덕양도 소태후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986년, 태후와 함께 조빈(曹彬)과 미신(米信)이 이끄는 송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공으로 초국공(楚國公)으로 봉해졌다. 이후에 대승상이 되어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야율휴가(耶律休哥)와 협력하여 민족 내부의 모순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경제와 국방을 튼튼히 하여 요왕조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다. 송은 소태후와 한덕양이 간통을 저질렀으며, 소태후가 한덕양의 아내를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소문이 돌자 요의 조정 내부에 모순이 격화되었다. 내분을 노린 송이 986년에 거란을 침공했다. 직접 응전한 소태후는 ‘양무적(梁無敵)’이라는 위명을 날렸던 송의 양업(梁業)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1004년에는 친히 송을 침공하고 역사상 유명한 단연지맹(澶淵之盟)을 체결했다. 5년 후인 1009년 12월에 소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친정을 시작한 성종 야율융서는 한덕양을 숙부처럼 존중했다. 한덕양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통치시대에 요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분류:송요전 분류:융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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