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206년부터 서기 436년까지 기간을 랴오허 지역에서 공손씨(公孫氏)와 부여, 고구려, 선비족 모용씨 등 군웅이 할거한 가운데 민족의 대융합이 이뤄진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신라계와 가야계, 크게 두 줄기로 대별되는 한국 金씨의 뿌리가 흉노족의 피가 이어진 기마민족, 「선비족 모용씨(鮮卑族 慕容氏)」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흉노족은 초원에서 쇠퇴하면서 40여만명이 모용선비족에 흡수됐는데, 이 때 성씨를 모용씨로 바꾸었다고 본다. 그리고 고구려 침공에 동원되었는데 고구려 북부전선으로 투입되어 모용씨가 들어왔을 때 「신라」는 없었고 사로국(斯盧國)이 맹주가 된 「진한(辰韓) 연맹」이 존재했을 것이다. 진나라에 기록한 책에 의하면 모용씨가 조선의 왕이 되엇다는 이야기나 나옵니다. 모용씨는 후연을 세운 사람인데 진나라 책에서는 모용씨를 조선왕으로 표시하엿씁니다. 모용 부족 명칭의 유래에 관련해 모용부의 한 추장이 걸을 때 관의 장식이 흔들리는 것을 좋아해서 부족사람들에게 그런 관, 즉 보요관(步搖冠)을 쓰게 하니 걸을 때 흔들린다는 뜻으로 보요(步搖)라 했으며, 이 보요가 와전돼 「모용」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모용 부족 기원설로는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모용 부족이 보요관을 즐겨 썼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린 것으로 보아 새 깃이나 나뭇가지 등의 길다란 장식을 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가야의 금관 또는 금동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조우관(鳥羽冠)이나 樹木型 立飾들은 걸음을 걸을 때 흔들리게 돼 있다. 모용부의 큰 특징이 보요관을 착용한 데 있다면 신라와 가야의 관모도 같은 선상에서 파악할 근거가 충분하다. 이밖에도 모용씨의 나라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묘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왜국으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선비족(鮮卑族)이 중원에 들어온 것은 흉노족(匈奴族)과 갈족(?族)의 뒤를 이은 것이다. 그러나 선비족은 부락이 아주 많고, 분포도 아주 넓었기 때문에,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중원에서 할거해서 차지한 기간은 가장 길었다. 가장 먼저 굴기한 모용씨는 한때 북방에서 가장 강성했다. 선비족은 차례로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북연(北燕), 남연(南燕)의 여러 국가를 건립했다. 오호난화가 약 130년간 이어졌는데, 모용씨가 건국했던 기간을 합치면 100년여가 된다. 이렇게 "오호(五胡)"중에서 건립한 정권의 존속기간이 가장 긴 부족이다. 선비족은 동호(東胡)의 후예이다. <<진서(晋書)>>에서는 그들이 "읍어자몽지야(邑於紫蒙之野, 자몽의 들에 모여 산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 내몽고의 동쪽 영성현(寧城縣) 일대에 해당한다. 진한(秦漢) 시대에 흉노에게 패배하여 무리들이 선비산으로 쫓겨나서 살았다. 그래서 스스로 '선비'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선비산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저, 대흥안령의 어느 곳일 것으로 추측한다. 모용씨는 선비족중에서 가장 먼저 중원에 진출한 한 갈래이다. 모용씨의 근거지는 요동이다. <<삼국지>>에는 "선비족은 모돈(冒頓)에게 패배한 후, 멀리 요동의 새외로 도망갔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모용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토지는 비옥하여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다. 그리하여 부족의 발전이 비교적 빨라진다. 나중에 부족중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름이 모용외(慕容?)였다. 그는 스스로 선비 대선우(鮮卑大單于)가 되어 한 지방에 할거한다. 그의 아들인 모용황(募容?)의 대에 이르러, 연(燕)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이어 고구려를 무찌르고,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 단씨(段氏)와 부여국(扶餘國)을 멸망시키고, 북방에서 웅기한다. 모용씨가 중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염위(?魏)의 황제 염민(?閔)의 "살호령(殺胡令)"의 덕을 많이 입었다. 북방한족들은 염민의 호소하에 "오랑캐를 대거 주살한다" 중원의 흉노족과 갈족은 기본적으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이때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준(慕容?)이 중원이 빈 틈을 타서 중원으로 들어와 하북, 산서 일대를 장악한다. 그리고 352년 염민을 주살하고, 염위를 멸망시킨다. 전연은 이때부터 중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흉노와 갈족이 이미 모조리 죽어버렸으므로, 갈족의 지배를 받던 저(?), 강(羌)도 기회를 틈타서 굴기하고 각자 정권을 수립한다. 특히 동진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저족은 이 기회에 전진(前秦)정권을 건립하는데, 세력 확장이 무척 빨랐다. 그리하여 전연의 주요한 적수로 등장한다. 중원은 이제 전연과 전진의 대치 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전연은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모용준이 죽은 후, 나이 겨우 12살된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즉위하고, 모용각(慕容珏)이 보정(輔政)이 된다. 모용각은 병력을 이끌고 동진의 하남, 회북의 땅을 침입하여 점령하니, 국력이 전성기에 이른다. 모용각이 죽은 후, 모용평(慕容評)과 모용수(慕容垂)가 공동보정이 되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다투게 되어 전연의 정국이 불안해진다. 특히 동진의 환온(桓溫)이 북벌을 감행하자, 모용수는 방두(지금의 하남성 준현 동남쪽)에서 진군을 대파한다. 명성이 크게 오르게 되자 그는 모용평의 질시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용수는 전진으로 도망간다. 전연은 이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다. 전진은 부견(?堅)이 정사를 돌보게 되면서 한족을 등용하고 정치개혁을 진행하며 군대를 강화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된다. 전진은 결국 전연을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자가 된다. 모용씨의 제2차굴기는 비수 대전(?水之戰)이후이다. 전진이 동진에게 패배하여 결국 멸망하고, 전진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은 일시에 모두 속속 독립하여 나라를 세운다. 그리하여 북방은 다시금 사분오열의 국면으로 진입한다. 전진의 군대내에서 있던 모용수는 기회를 틈타 거병을 하고, 중산(中山, 하북성 정주)을 수도로 정하고 후연을 건립한다. 모용영(慕容永)도 장자(長子, 지금의 산서성 장치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서연을 세운다. 나중에 모용수는 서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적위(翟魏)등 군소정권을 멸망시켜서 기본적으로 전연의 판도를 회복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중원의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강족(羌族)이 건립한 후진(後秦)이 다시 중원의 서부지방에서 굴기한다. 후진은 겨우겨우 연명하던 전진을 멸망시킨 후, 다시 후량(後凉), 서진(西秦)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결국 후연과 나란히 병립하는 북방의 강국이 된다. 단순히 후진과 대치하고 있었더라면, 후연에게는 북방을 통일시킬 기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비족의 또 다른 부족인 탁발씨(拓跋氏)도 북방에서 흥기하고 북위(北魏) 정권을 건립한다. 탁발씨는 멀리 막북에 살고 있었는데, 남으로 내려온 후에도 거친 기상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후연의 북방최대의 적수가 된다. 후연은 북위와 매년 전쟁을 벌이지만 불리하게 되고, 참합피(지금의 산서 양고의 경내)에서 참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북의 군현을 모조리 잃는다. 후연은 북연과 남연으로 분단되고, 남연은 나중에 유송(劉宋)에 멸망당한다. 북연은 결국 북위에 멸망한다. 이렇게 하여 모용씨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분류:모용씨 분류: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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