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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오지만, 성안에서 발굴된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홍계남 장군은 3천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이곳에서 왜군을 무찔러 안성 고을을 지켰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20m이며, 서운산의 두 봉우리를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토성이다. ‘북산리성터’라 부르기도 한다. 가파른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쌓았으며, 흙을 쌓은 곳은 450m 정도이다. 성안에서는 돌부처, 우물터, 절터,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성안에는 전투 시 지휘하던 장수바위, 용굴(龍窟)이라 불리는 작은 동굴 등이 있다. 북쪽과 남쪽에 성문터와 성벽 안쪽에는 도랑을 판 흔적이 있다.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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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서운 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계남 장군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오지만, 성안에서 발굴된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한다. 임진왜란 당시 홍계남 장군은 3천여 명의 의병과 함께 이곳에서 왜군을 무찔러 안성 고을을 지켰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20m이며, 서운산의 두 봉우리를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토성이다. ‘북산리성터’라 부르기도 한다. 가파른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쌓았으며, 흙을 쌓은 곳은 450m 정도이다. 성안에서는 돌부처, 우물터, 절터,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었으며, 성안에는 전투 시 지휘하던 장수바위, 용굴(龍窟)이라 불리는 작은 동굴 등이 있다. 북쪽과 남쪽에 성문터와 성벽 안쪽에는 도랑을 판 흔적이 있다.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차령 산맥의 주된 봉우리인 서운산의 봉우리 2개를 연결하여 마치 말안장 모양으로 쌓은 토성인 서원산성은 ‘북산리성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 비교적 성벽이 잘 남아있으며, 성벽 안쪽에는 도랑을 판 흔적도 있다. 성의 둘레는 620m이고, 흙을 쌓은 곳은 450m 가량 되는데, 흙은 능선을 따라 깎아서 다졌으며 가파른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성안에는 전투시 지휘하던 곳으로 이용된 장수바위가 있고, 북쪽과 남쪽에 성문터가 있는데 주로 남쪽으로 출입을 하였던 것 같다. 성안에서는 우물터, 절터, 돌부처, 작은 동굴, 토기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생각된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홍계남 장군이 북쪽으로 올라오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성안에서 발견된 유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처음 쌓아서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이용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왜적을 물리치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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