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사람들에게 배중손 장군의 의미는 작지 않다. 진도 사람들에게는 삼별초의 진도 패전이 그 뒤 오랜 세월에 걸친 유랑과 고통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정복해 나가던 칭기즈칸의 몽고를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고려정부가 결국 몽고에 항복하자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도에서, 항몽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말았고 삼별초는 전멸, 역사에서 사라진다. 배중손은 저 물길을 찾아 진도로 왔다. 강화도를 떠난 지 74일 만인 8월19일 삼별초는 진도에 도착한다. 진도는 넓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전남 진도로 향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항전의 근거지로 택한 것은 대몽 항쟁의 전략상 유리한 지역이었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며, 육지와 가까웠기 때문이였다. 1271년 (김진관 12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 과 흔도 (炘都)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진도 를 향해 공격한다.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진도 사람들에게 배중손 장군의 의미는 작지 않다. 진도 사람들에게는 삼별초의 진도 패전이 그 뒤 오랜 세월에 걸친 유랑과 고통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를 정복해 나가던 칭기즈칸의 몽고를 대항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고려정부가 결국 몽고에 항복하자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도에서, 항몽 전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결국 패하고 말았고 삼별초는 전멸, 역사에서 사라진다. 배중손은 저 물길을 찾아 진도로 왔다. 강화도를 떠난 지 74일 만인 8월19일 삼별초는 진도에 도착한다. 진도는 넓다. 전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다.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전남 진도로 향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항전의 근거지로 택한 것은 대몽 항쟁의 전략상 유리한 지역이었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며, 육지와 가까웠기 때문이였다. 일본에서 1271년에 작성된 '고려첩장 불심조조'라는 문서에서 고려가 진도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당시 고려는 이미 몽고에 굴복해서 강화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뒤였다.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황제로 삼고, 대 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도착했다. 궁궐터가 층층이 있는 용장산성과 그 뒤로 능선을 따라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바로 아래로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1271년 (김진관 12년) 음력 5월 상장군 김방경 과 흔도 (炘都)가 지휘하는 여몽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진도 를 향해 공격한다.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삼별초가 진도로 간 이유는 항몽(몽고에 대항)을 하기 위해서다. 진도의 용장 산성에서 전투에 패해 다시 제주도로 갔다. 전라도의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이 점차 삼별초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고려 정부와 몽고의 여.몽 연합군이 총공격으로 진도 를 함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