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군은 한나라 때 두었다. 삼국시 위(魏)나라가 범양군이라 이름을 고쳤다. 노식(盧植-192년)은 후한의 대신으로 자는 자간(者幹)이였다. 그는 탁군 사람으로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때 관군을 이끌고 나가 연전 연승했으나, 전선 시찰을 나왔던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로 귀양을 갔다. 유비는 고향 탁군에서 의용군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관우ㆍ장비와 더불어 유비의 이름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다. 장비(張飛)는 자는 익덕(翼德)이며 대대로 탁군에 장원과 토지를 가지고 살면서 술을 팔고 도야지 잡아 지내오거니와, 천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하였다. 유비가 장비의 지원 아래 탁군의 유협 집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대략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군사들의 동원령이 내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여름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회수 남쪽의 탁군은 요동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탁군은 한나라 때 두었다. 삼국시 위(魏)나라가 범양군이라 이름을 고쳤다. 노식(盧植-192년)은 후한의 대신으로 자는 자간(者幹)이였다. 그는 탁군 사람으로 유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유비와 공손찬의 스승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때 관군을 이끌고 나가 연전 연승했으나, 전선 시찰을 나왔던 환관 좌풍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무고로 귀양을 갔다. 유비는 고향 탁군에서 의용군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때 관우ㆍ장비와 더불어 유비의 이름이 처음 역사에 등장한다. 장비(張飛)는 자는 익덕(翼德)이며 대대로 탁군에 장원과 토지를 가지고 살면서 술을 팔고 도야지 잡아 지내오거니와, 천하 호걸들과 사귀기를 좋아하하였다. 유비가 장비의 지원 아래 탁군의 유협 집단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대략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수양제의 대운하 건설 수양제는 605년에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 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河)를 개통했습니다. 이 대운하는 탁군에서 항주까지 짓는 대공사였다. 이에 백성들의 불만을 컸다 하며, 그것도 모자라 양광은 수도 장안 대신, 낙양에 동경(東京)을 쌓게 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군사들의 동원령이 내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여름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회수 남쪽의 탁군은 요동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고구려 정벌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난현성과 당산을 빼앗겼다는 보고를 접하자 탁군(?郡)의 주진성(主陳城)에서 몸을 추스리고 다시 전선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연개소문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난현성을 잃으면 하북 지방 점령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