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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팽성(彭城)은 서주 (徐州 )로 초패왕 항우의 수도였다. 3년만에 진(秦)나라를 멸하고(B.C. 206) 스스로 초패왕(楚 王)이 된 항우는 팽성[彭城: 서주(徐州)]을 도읍으로 정하고 의제(義帝)를 초나라의 황제로 삼았다. 팽성은 번영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흥 도시였다. 대평원의 한복판에 사통팔달의 길이 있었다. 항우가 무리하게 팽성 도읍 이전을 재촉하게 된 것은 당시 거리에서 떠돌던 노래 때문이었다. "부귀해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알아줄 이가 있겠는가". 함양을 두고 항우가 초나라 팽성으로 천도를 고집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이를 말렸다. 하지만 항우는 화를 내며 한생의 말을 막자, 한생이 크게 탄식하고 초나라 사람은 원래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 이라는 말로 결사반대하였다. 항우가 한생의 간언을 물리치고 고향 팽성으로 돌아간 결과는 죽음이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몸이니 고향으로돌아가는 허락이나 받을 수밖엔 없다" 범증은 항우를 크게 원망하며 고향인 팽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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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팽성(彭城)은 서주 (徐州 )로 초패왕 항우의 수도였다. 3년만에 진(秦)나라를 멸하고(B.C. 206) 스스로 초패왕(楚 王)이 된 항우는 팽성[彭城: 서주(徐州)]을 도읍으로 정하고 의제(義帝)를 초나라의 황제로 삼았다. 팽성은 번영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흥 도시였다. 대평원의 한복판에 사통팔달의 길이 있었다. 항우가 무리하게 팽성 도읍 이전을 재촉하게 된 것은 당시 거리에서 떠돌던 노래 때문이었다. "부귀해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알아줄 이가 있겠는가". 함양을 두고 항우가 초나라 팽성으로 천도를 고집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이를 말렸다. 하지만 항우는 화를 내며 한생의 말을 막자, 한생이 크게 탄식하고 초나라 사람은 원래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 이라는 말로 결사반대하였다. 항우가 한생의 간언을 물리치고 고향 팽성으로 돌아간 결과는 죽음이었다. 함양을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약탈한 재물과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변두리의 팽성으로 천도를 감행했다. 항우는 팽성에서 우희를 얻었다. 진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에 오른 직후였다. 혼례를 치르지는 않았다. 다만 아내처럼 데리고 사는 여인은 있었다. 우희였다. 기둥이던 항량이 전사하자 회왕(懷王)은 큰 두려움에 휩싸여 도읍인 우이(盱台)를 버리고 팽성으로 합류했다. 이곳에서 회왕은 항우, 여신(呂臣 초나라 장수)의 군대를 통합해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4월에 영지를 받은 여러 제후는 각자 병력을 이끌고 하사받은 영지로 떠났다. 항우도 팽성으로 돌아왔다. 항우는 팽성에 있던 의제에게 도성을 침현으로 옮기라고 재촉했다. 많은 지역의 왕들이 유방에게 들어온다.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은 항우의 발판이며 초나라의 심장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유방은 56만여명을 얻게되자 오만해졌다. 곧바로 팽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항우는 제나라를 치기 위해 산동에서 전광과 교전 중이라 팽성은 비어있었다. 총 60만이 항우의 본거지, 팽성을 공격한다. 당시 팽성은 항우의 장수 팽월이 지키고 있었는데 내심 항우에 불만이 많은 자였다. 그래서 팽성을 한왕에게 넘겨주었다. 비어 있는 팽성을 단숨에 함락한 유방은 기고만장하였다. 그는 주연을 열어 승리를 자축했다. 파촉 땅을 유방에게 주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천하는 유방에게 돌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을 차지한 유방은 자신이 마치 천하를 제패한 양 안이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산동성 성양을 포위하고 있던 항우는, 팽성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더이상 한군에 대한 공격을 미룰 수 없었다. 항우가 팽성을 되찾기 위해 이끈병력은 3만이고 팽성에 주둔한 유방의 군대는 56만이었다.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하남성(河南省) 내]로 도망쳤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몸이니 고향으로돌아가는 허락이나 받을 수밖엔 없다" 범증은 항우를 크게 원망하며 고향인 팽성으로 향했다. 결국 오랜 전투 끝에 지칠 대로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항우는 팽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때 한나라 군의 급습소식이 전해졌다. 회하(淮河)를 건넜을 때 수하에 남아 있던 8백 명은 겨우 1백 명만 남아 있었다. 항우는 팽성(彭城)으로 돌아가 병마를 정돈하여 권토중래하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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