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티아누스 [Caesar Domitianus Augustus,(영) Domitian. 본명은 Titus Flavius Domitianus(~AD 81). 51. 10. 24~ 96. 9. 18 로마]는 로마의 황제(81~96 재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치세 말년에는 여러 유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그의 공포정치로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 자신을 '주님'과 '신'으로 부를 것을 명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라가 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 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의 음모로 결국 살해당했다(96. 9. 18). 그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으나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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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티아누스 [Caesar Domitianus Augustus,(영) Domitian. 본명은 Titus Flavius Domitianus(~AD 81). 51. 10. 24~ 96. 9. 18 로마]는 로마의 황제(81~96 재위)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치세 말년에는 여러 유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그의 공포정치로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기 자신을 '주님'과 '신'으로 부를 것을 명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티스를 선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라피스를 숭배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오시리스를 받들었다. 엘라가 발루스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일신교 신앙을 강화하려 했다. 훗날 로마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소[小]제1시민)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콘술(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형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79년 6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누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이를 허락받지 못해 결국 형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훗날 형의 죽음(81. 9. 13)에도 어느 정도 관여한 듯하다.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역사가들인 타키투스와 소(小) 플리니우스에게서 받은 혹평(수에토니우스는 아주 비판적은 아니었음)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행정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어 로마와 속주(屬州)의 행정관들을 강력히 통제했으며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칭송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군사·외교 정책도 모두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집권초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의 진격을 시행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를 건설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미처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레기온(군단)과 많은 군사를 잃었다. 이것은 타키투스도 지적했듯이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정도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해 군대 내에서 인기를 그대로 유지했다. 진짜 문제는 그 자신의 법률상 지위와 의전행사에서의 위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자주 콘술직을 맡았으며(82~88년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콘술이 되었음), 85년에는 종신 켄소르(감찰관)가 되어 원로원 의원과 장군들의 행동을 통제했다. 원로원에서는 개선식 의상을 입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마다 1번씩 개최한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해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킨(84) 것은 다른 사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87년에 일어난 일반적인 소요의 전초였다. 89년 1월 1일에는 상(上)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두 번째 반란은 하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라피우스 막시무스Lappius Maximus가 신속히 진압했다. 이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딸)의 음모로 결국 살해당했다(96. 9. 18). 그뒤 곧 제위를 이은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으나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에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나보나 광장, 68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조성한 전차 경기장 유적지이다. 나보나 광장 밑에 잠들어 있는 도미티아누스 운동장이 로마 시의 유일한 상설운동장이었다. AD 270년경에 잠깐 동안 권력을 잡았던 도미티아누스의 얼굴이 있는 동전은 단두개 밖에 없다. 각각 경매가 15억, 20억원이 나왔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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