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각휴(申珏休, 1896년 충북 영동 ~ 1976년 8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북경대학(北京大學)을 2년 수료하였다. 한때 화풍광산(和豊鑛山) 소장을 지냈다. 대한청년단 옥천군 단장과 옥천군 축산동업조합장을 맡기도 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 때 고향인 옥천에서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출마, 당선된 데 이어 1954년 제3대 의원, 1960년 제5대의원을 지냈다. 민주당 창당과 함께 노농부장(勞農部長)·충청북도당위원장 등의 책임을 맡았다. 일찍부터 그는 농림정책에 일가견을 이루고 야당의 농림관계 원내대책을 도맡아 추진하였다. 자유당 말 제3대국회 때는 이미 그의 나이 60고령이었으나 농림부 간부들을 국회농림위원회에 불러다놓고 공격할 때는 빈틈이 없었다. 최인규가 외자청장으로 있을 때 국회에 출석하여 발언하는 도중, 신랄한 추궁에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린 일도 있다.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윤보선·김도연 등과 함께 신한당(新韓黨)창당에 참여하는 등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치의욕을 보였으나 원내로 진출하지는 못하였다.
신각휴(申珏休, 1896년 충북 영동 ~ 1976년 8월 10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북경대학(北京大學)을 2년 수료하였다. 한때 화풍광산(和豊鑛山) 소장을 지냈다. 대한청년단 옥천군 단장과 옥천군 축산동업조합장을 맡기도 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선거 때 고향인 옥천에서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출마, 당선된 데 이어 1954년 제3대 의원, 1960년 제5대의원을 지냈다. 민주당 창당과 함께 노농부장(勞農部長)·충청북도당위원장 등의 책임을 맡았다. 일찍부터 그는 농림정책에 일가견을 이루고 야당의 농림관계 원내대책을 도맡아 추진하였다. 자유당 말 제3대국회 때는 이미 그의 나이 60고령이었으나 농림부 간부들을 국회농림위원회에 불러다놓고 공격할 때는 빈틈이 없었다. 최인규가 외자청장으로 있을 때 국회에 출석하여 발언하는 도중, 신랄한 추궁에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린 일도 있다.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윤보선·김도연 등과 함께 신한당(新韓黨)창당에 참여하는 등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치의욕을 보였으나 원내로 진출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