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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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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6세 [Ptolemaeos VI Philometor, 기원전 180경~145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재위186-145)의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장인은 사위가 다스리는 지역을 차지하고 싶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이집트를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형제와 공동통치하는 모험을 벌여 다시 이집트를 통합할 수 있었다. 1. * 넘겨주기 분류: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분류: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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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톨레마이오스 6세 [Ptolemaeos VI Philometor, 기원전 180경~145년에 활동한 마케도니아 왕조 출신 이집트의 왕이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재위186-145)의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결혼했다. 장인은 사위가 다스리는 지역을 차지하고 싶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이집트를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로마의 개입과 몇 차례에 걸쳐 자신의 형제와 공동통치하는 모험을 벌여 다시 이집트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 사이의 아들로 어머니와 공동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했다. 남편이 죽고 나자(기원전 180년), 클레오파트라 1세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함께 공동집정했다. 클레오파트라 1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였으나 시리아 편을 들지 않고 계속해서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함께 이집트를 잘 다스렸으나 기원전 176년 어머니가 죽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2명의 야심만만한 궁정 관리들에게 크게 의지했다. 기원전 173년경 그는 자신의 여동생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혼인했고 고문들의 의견에 따라 코엘레시리아로 쳐들어갈 준비를 갖추었다. 기원전 170년 형제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통치에 합류했고 코엘레시리아에 대한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이집트의 국경 도시인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는 기원전 170년 이집트를 침공했고 다시 기원전 168년에도 쳐들어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동맹국인 로마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기원전 164년 10월경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쫓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로 도망쳐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따라 이집트를 분할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레나이카를,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키프로스와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했다. 키레나이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2번이나 로마를 방문해 키프로스를 달라고 요구했다. 로마 원로원은 결국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능란한 외교술로 로마의 결정을 늦추게 하고 기원전 154년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차지하려 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키레나이카를 다시 돌려주고 자신의 딸과 결혼하게 하는 한편, 원조 명목으로 곡물까지 주었다. 한편 로마에서는 대(大)카토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훌륭하고 자비로운 통치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것은 그뒤까지 계속해서 이어진 음모의 일환이었으나 이집트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기원전 155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키프로스를 차지하려는 계략을 세우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증오심을 일부러 자극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는 알렉산데르 발라스라는 인물이 나타나자 기원전 153년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지원할 채비를 서두르는 한편 그에게 자기 딸까지 주어 혼인하도록 했다. 기원전 148년경 그는 다시 한번 시리아로 진군했고 그때 또다른 왕위 요구자가 나타났다. 알렉산데르 발라스의 암살 기도를 물리친 그는 발라스의 아내가 된 자기 딸을 새로운 왕위 요구자에게 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새로운 왕위 요구자를 지원하기는 했으나 안티오크의 시민들과 시리아군은 이집트의 왕에게 시리아의 통치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를 거절했으나 얼마 안 가 알렉산데르 발라스가 전투에서 패한 뒤 살해당한 그 자리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져 머리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고 며칠 뒤 죽었다. 1. * 넘겨주기 분류: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분류: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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