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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폼페이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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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폼페이우스 [Pompeius]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정치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여 신망을 얻고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프리카 부대에 의해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로 불렸다(BC 82~81). 폼페이우스의 이름은 지속적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의 종말은 루카누스의 최상의 시편들에 영감을 주었다. 제국 내에서 그는 공식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유명한 작가들이 그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동시대인들이 그에 관해 명석하거나 공정한 평가를 내린 예는 드물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에 관해 글을 쓸 때 분노보다 슬픔이 앞선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자 했다. 그의 선전은 주도면밀한 것으로 교묘하게 경쟁자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내용을 담았다. 키케로의 일관성 없는 평가는 그가 사태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뿐이다. 키케로의 연설에 나오는 폼페이우스에 대한 부풀린 찬사는 그의 편지에 실린 끈덕진 비난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도력을 존경했으며 결단의 순간에 그의 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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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폼페이우스 [Pompeius]는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정치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여 신망을 얻고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구였으나 후에는 정적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아프리카 부대에 의해 마그누스(대왕)라는 칭호로 불렸다(BC 82~81). 폼페이우스의 이름은 지속적인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의 종말은 루카누스의 최상의 시편들에 영감을 주었다. 제국 내에서 그는 공식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유명한 작가들이 그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동시대인들이 그에 관해 명석하거나 공정한 평가를 내린 예는 드물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폼페이우스에 관해 글을 쓸 때 분노보다 슬픔이 앞선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자 했다. 그의 선전은 주도면밀한 것으로 교묘하게 경쟁자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내용을 담았다. 키케로의 일관성 없는 평가는 그가 사태를 분명히 보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줄 뿐이다. 키케로의 연설에 나오는 폼페이우스에 대한 부풀린 찬사는 그의 편지에 실린 끈덕진 비난으로 인해 손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도력을 존경했으며 결단의 순간에 그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혁명가도 아니고 반동도 아니었으며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틀을 깨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도권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으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사용한 방법이 귀족지배층의 이익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사태를 겪었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수동적인 역할로 떨어졌으며 귀족들이 자신의 주도권을 인정하게 만들 계기가 연이어 닥쳐오기를 기다리거나 몰래 모의하는 태도를 취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기다리는 태도가 이중성의 표현이라고 보았으며 또다른 사람들은 순전한 정치적 무능력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치가로서 무능했는데 그 까닭은 음모나 무자비한 행동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에서 솔직함과 일관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군사 지도자로서 폼페이우스는 진정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그에게는 카이사르 같은 천재성이나 활력과 위세, 인간관계의 부드러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용의주도하고 철저했으며 완벽한 행정가였다. 그가 가슴에 품은 제국의 포부는 결코 카이사르보다 협소하지 않았다. 그는 능률적이고 청빈한 행정과 사법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동시대인들 다수가 믿듯이 자신 스스로 그런 목표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다. 당대의 가장 부자였던 폼페이우스는 막대한 재산을 신중하게 투자했다. 그의 영지는 관리하기 적합한 규모로 나뉘어 이탈리아 전역에 분포해 있었다. 그는 온갖 사치스러운 개선식 행사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잔혹한 살인경기를 벌여 서민들의 환심을 샀지만 생활은 평범했고 스토아 철학자 파나이티우스의 친구이며 찬양자였다. 3번째 아내인 무키아는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 그리고 딸 폼페이아를 낳아주었다. 그는 그녀의 부정을 이유로 기원전 62년에 이혼했다. 기원전 60년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를 성립시켰고, 이를 통해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사위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세력을 이용하여국가를 넘볼 정도까지 세력이 강대해졌고 율리아는 그가 가장 사랑한 아내였다. 폼페이우스와 그의 잔당까지 완전히 소탕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 로마의 1인 지배자인 ‘종신 독재관’이 돼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코르넬리아는 그보다 더 오래 살았고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1. * 넘겨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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