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여(胥餘)또는 수유(搜庾)는 기자(奇子)의 이름이였다. 사마표가 이르기를 기자의 이름은 서여라고 되어 있다. 기자는 기국의 군주이며 은나라 작위가 자작이였다. 기자는 하나라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기원전 ll22년에 은(般)이 멸망했다. 은의 마지막 왕인 주(緖)의 친척이라는 서여 즉 기자(築子)가 태행산(太行)서북쪽 땅에 피난와서 살았다. 기자 서여의 무덤이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있었다. 강태공은 은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니 주나라 무왕이 은의 충신이었던 기자(奇子)는 조선에 봉(封)하니 이로 인하여 자손이 성(씨)을 삼았다. 마한세가 하에 따르면 서여는 태항산의 서북 땅으로 피거(避居)하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돌아다니며 살폈고 열병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된다. 이때 마한은 아도(阿도)였다. 북부여는 “수유(須臾) 기자”라고 칭하였는데 요서의 기자가 살던 곳이 수유(須臾)다. 기자 자서여의 이름 서여(胥餘,xuyu)가 수유(須臾,xuyu)와 발음이 똑같으니, 자서여의 성이 수유성(須臾城)이라고 불린 것이 된다.
서여(胥餘)또는 수유(搜庾)는 기자(奇子)의 이름이였다. 사마표가 이르기를 기자의 이름은 서여라고 되어 있다. 기자는 기국의 군주이며 은나라 작위가 자작이였다. 기자는 하나라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감옥에 갇혔다. 기원전 ll22년에 은(般)이 멸망했다. 은의 마지막 왕인 주(緖)의 친척이라는 서여 즉 기자(築子)가 태행산(太行)서북쪽 땅에 피난와서 살았다. 기자 서여의 무덤이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있었다. 강태공은 은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니 주나라 무왕이 은의 충신이었던 기자(奇子)는 조선에 봉(封)하니 이로 인하여 자손이 성(씨)을 삼았다. 마한세가 하에 따르면 서여는 태항산의 서북 땅으로 피거(避居)하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돌아다니며 살폈고 열병하고 돌아왔다라고 기록된다. 이때 마한은 아도(阿도)였다. 북부여는 “수유(須臾) 기자”라고 칭하였는데 요서의 기자가 살던 곳이 수유(須臾)다. 기자 자서여의 이름 서여(胥餘,xuyu)가 수유(須臾,xuyu)와 발음이 똑같으니, 자서여의 성이 수유성(須臾城)이라고 불린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