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구투조프[러시아어: Михаил Илларионович Кутузов / 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 1745년 9월 16일(구력: 9월 5일) ~ 1813년 4월 28일(구력: 4월 16일) ]사령관은 나폴레옹군과의 전투를 기피함으로써 병력을 온존하게 퇴각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다. 프랑스 황제에게 통렬한 타격을 안겨 준 러시아 장군의 이름이, 쿠투조프였다. 육전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나폴레옹이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처음으로 쓴 잔을 마시게 된다.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더는 모스크바 사수를 원했지만 러시아군 총사령관 구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내어 주더라도 군대만 건재하면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며 모스크바와 군대를 동시에 잃어버릴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결론은 모스크바를 포기하는 청야작전을 수립하고 칼루가로 러시아 전군을 철수시켰다. 즉 모스크바를 포기하면서까지 나폴레옹군과의 전투를 기피함으로써 병력을 온존하게 퇴각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구투조프 사령관은 나폴레옹군을 동장군(冬將軍)이 오는 겨울까지만 묶어두면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할 것으로 생각했다.쿠투조프는 14세 때 하사로 러시아군에 입대해 폴란드(1764~69) 및 투르크(1770~74)와의 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다. 크림에서 6년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1784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1774년 심한 머리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1787~91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 이후 여러 가지 외교·행정
미하일 구투조프[러시아어: Михаил Илларионович Кутузов / Mikhail Illarionovich Golenishchev-Kutuzov, 1745년 9월 16일(구력: 9월 5일) ~ 1813년 4월 28일(구력: 4월 16일) ]사령관은 나폴레옹군과의 전투를 기피함으로써 병력을 온존하게 퇴각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다. 프랑스 황제에게 통렬한 타격을 안겨 준 러시아 장군의 이름이, 쿠투조프였다. 육전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던 나폴레옹이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처음으로 쓴 잔을 마시게 된다.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더는 모스크바 사수를 원했지만 러시아군 총사령관 구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내어 주더라도 군대만 건재하면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며 모스크바와 군대를 동시에 잃어버릴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결론은 모스크바를 포기하는 청야작전을 수립하고 칼루가로 러시아 전군을 철수시켰다. 즉 모스크바를 포기하면서까지 나폴레옹군과의 전투를 기피함으로써 병력을 온존하게 퇴각시키는 방안을 채택했는데 구투조프 사령관은 나폴레옹군을 동장군(冬將軍)이 오는 겨울까지만 묶어두면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할 것으로 생각했다.쿠투조프는 14세 때 하사로 러시아군에 입대해 폴란드(1764~69) 및 투르크(1770~74)와의 전쟁에서 전투경험을 쌓았다. 크림에서 6년간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밑에서 복무하면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고 1784년에는 소장이 되었다. 1774년 심한 머리 부상을 입고 한쪽 눈을 잃었지만 1787~91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 이후 여러 가지 외교·행정직을 맡았으나 1802년 불신을 받게 되자 고향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3년 후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대항한 제3차 동맹에 가담하면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다시 불렀다. 1805년 11월 11일 뒤렌슈타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나 알렉산드르의 압력으로 아우스터리츠 전투(12. 2)에 가담해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곧 그를 몰다비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투르크에 몇 차례 패배를 안겨준 뒤 1812년 5월 28일에는 러시아측에 유리한 조건으로 러시아 - 투르크 평화협정을 체결했다(부던레부쿠레슈티 조약). 6월에 나폴레옹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8월 9일 당시 육군원수였던 그는 전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날 공작작위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군사력을 아껴두기로 결심하고 프랑스군 앞에서는 후퇴하면서 소규모 전투만 치르면서 전투를 제한했다. 그의 판단은 옳았지만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큰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9월초에야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랐다.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9월 7일에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전투는 격렬했으나 뚜렷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전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나 쿠투조프는 병력의 반 이상을 잃고 남동쪽으로 후퇴, 결국 프랑스군의 모스크바 입성을 허락했다(보로디노 전투). 그러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실패하고,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에 10월에 모스크바를 떠났다. 쿠투조프는 나폴레옹군이 비옥한 남쪽 행로로 가지 못하게 차단했고(말로야로슬라베츠 전투, 10. 24), 와해 지경에 있던 프랑스군을 침입 당시 그들이 폐허로 만들었던 길로 도주하게 함으로써 큰 전투를 치르지 않고 적을 몰락시켰다. 나폴레옹군이 베레지나 강을 건넌 뒤(11. 26~28) 그는 폴란드와 프로이센까지 추격해들어갔고 프로이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