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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비노 마비키(吉備眞備,695∼775)는 당나라 유학파의 일본 정치인이였다. 고대 일본은 견수사(遣隋使)를 세 번, 견당사를 열아홉 번 중국의 장안에 파견해 수·당의 선진문화를 배웠다. 견당사의 인원은 대개 100명 이하였으나, 많을 때는 594명에 달한 적도 있었다. 당시 일본은 사회발전 단계상 고대 노예제로부터 중세 봉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있었는데, 고도쿠 천황(孝德天皇) 때 일어난 봉건제 혁명인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는 견당사·유학생·승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이 당에서 익힌 발전된 봉건제를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에 이식한 것이다. 717년 기비노 마키비 등은 견당유학생으로 당나라에 간다. 견당사로서 중국?당에 건넌 기비노 마키비가, 당의 바둑 명인과 바둑의 승부를 했다. 바둑을 모르는 기비노 마키비이지만, 너무나 기적적으로 승리한 마비키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17년만에 겐보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샹기는 주의 무제가 만들었다고 하며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 )가 당에 다녀오면서 장기가 전래되었다. 마키비는 ‘당례(唐禮)’와 ‘대연역경(大衍曆經)’을 당에서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이것이 일본 조정에서 예의와 역법(曆法) 개혁의 기본 교본이 됐다. 나가야왕의 변 이후 고묘시가 황후가 되고 후지와라씨의 전성시대가 되는 듯하나 재해와 기근이 발생하고 도적이 횡행하는 들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735년 천연두가 발생해서 후지와라씨 4형제는 사망함으로써 조정의 기능은 마비되기 이른다. 이에 황족 출신의 다치바나노 모로에가 우대신으로써 정권을 잡고 당에서 귀국한 승 겐보와 기비노 마키비가 천황의 총애를 받아 정계에 진출하였다.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 지방 호족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대신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다. 그러나 후지와라씨에게 반감을 사서 후지와라노 히로쓰구가 740년 규슈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중앙에 끼친 영향이 심각해졌다. 그는 고켄 천황을 든든하게 보필한 측근으로서 난을 토벌한다. 일본은 다이카 개신에 의해 당률을 채용한 대보 법령(大寶法令)을 반포했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시행했으며, 반전제(班田制)와 조용조(租庸調, 토지·호에 부과한 세제)를 단행했다. 동시에 당의 장안성을 모방해 교토를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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