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fs:comment
| - 육진 개척(六鎭開拓)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에 설치한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개척한 것이다. 세종 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 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다. 이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어, 개국 초 조선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까지 이르고 있었다. 태종 때 경원·경성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족에게 교역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태종 9년(1409) 경원부를 중심으로 하여 우디하[兀狄哈]의 내습이 잦아지자 경원에서 경성으로 부를 옮기고, 경성을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 10년(1410) 경원부를 중심으로 우디거족 등의 내습이 잦아지자, 다음해 부(府)를 폐지하고 부거(富居;지금의 鏡城郡)로 옮겼다. 그 뒤 얼마간 부령 이북은 여진족에게 방치되었고, 세종 때에 와서도 내습이 끊이지 않았다. 분류:조선 분류:육진
|
abstract
| - 육진 개척(六鎭開拓)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 여진족(女眞族)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에 설치한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개척한 것이다. 세종 대왕이 동북으로 `육진'을 개척하고, 서북으로 `사군'을 차려 놓고, 남쪽 백성들을 옮겨 심었으니, 자아 충실의 필요감이 강렬하게 되었다. 이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어, 개국 초 조선의 영역은 두만강 하류까지 이르고 있었다. 태종 때 경원·경성에 무역소를 두어 여진족에게 교역 편의를 제공하였으나, 태종 9년(1409) 경원부를 중심으로 하여 우디하[兀狄哈]의 내습이 잦아지자 경원에서 경성으로 부를 옮기고, 경성을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 10년(1410) 경원부를 중심으로 우디거족 등의 내습이 잦아지자, 다음해 부(府)를 폐지하고 부거(富居;지금의 鏡城郡)로 옮겼다. 그 뒤 얼마간 부령 이북은 여진족에게 방치되었고, 세종 때에 와서도 내습이 끊이지 않았다. 세종 대왕은 육진 개척과 사군 설치 등 튼튼한 국방을 바탕삼아 토지제도와 세제 개혁, 과학기술 육성 등으로 단순히 한글을 창제하고 용비어천가를 지은 언어적 지도자에 그치지 않았다. 세종 시대의 국방을 담당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킨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하여 변방의 안정을 정착시킨 김종서였다. 인무(仁武)은 세종 때 장령과 병조 판서를 거쳐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되어 10년 동안 김종서 장군과 함께 육진을 개척하였다. 그는 세종·문종 2대에 걸쳐 현감를 비롯하여 관찰사·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되었다.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이 일을 김종서가 맡았다. 김종서가 약 10년간의 노력 끝에 육진 개척을 완수하고 나서야 조선은 비로소 안전지대가 될수 있었다. 세종은 김종서를 보내 육진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의 공험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조선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은 김종서(金宗瑞)뿐이다. 공의 공적은 육진을 설치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1434년 이래 10여 년간에 걸친 육진의 개척은 서북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세종 15년(1433) 여진족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고, 적극적인 북진정책에 나섰다. 이듬해 6진의 설치를 시작, 세종 24년(1442) 훈융(訓戎;慶源北方)에서 독산연대(禿山烟臺;會寧西方)까지 장성을 쌓고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다. 그 뒤 여진족은 서방쪽으로 이주하였다. 6진에 각도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 조선의 영역은 장성 밖 일부 지역을 제외한 두만강 이남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 고집을 부리던 `안탁갑` 은 드디어 세종의 빈이 되었는데, 그는 세종의 한글 창제와 김종서 장군의 육진 개척에 크나큰 공을 세웠다. 너무도 안탁갑이에게 빠져 있는 임금을 걱정한 신하들은 그를 청파동으로 물리쳤다. 분류:조선 분류:육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