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mb|thumb|255px|고대 그리스 인에게 알려진 리키아의 위치 리키아(Lycia) 또는 뤼시아는 터키의 남동 해안의 안탈리야와 무글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이다. 로마 제국 성립 후 속주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은 리키아인을 히타이트 연맹으로 기술하였다. 리키아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 아수와 동맹의 구성 국가였는데 루카로 나타난다.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후, 리키아는 독립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리키아는 아테네의 판디온 2세의 아들인 리쿠스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졌다. 고대에 영역은 한나라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하게 독립적인 도시국가의 단단하게 짜인 동맹으로 남았다. 리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 판명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 에로테스는 리키아가 그들의 기념비보다는 그들의 이전 영광을 포함하므로 역사가 흥미롭다고 하였지만 리키아의 유적에서 많은 유물들이 특히 그들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깍아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thumb|thumb|255px|고대 그리스 인에게 알려진 리키아의 위치 리키아(Lycia) 또는 뤼시아는 터키의 남동 해안의 안탈리야와 무글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이다. 로마 제국 성립 후 속주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기록은 리키아인을 히타이트 연맹으로 기술하였다. 리키아는 아마 기원전 1250년경 아수와 동맹의 구성 국가였는데 루카로 나타난다. 히타이트 제국의 붕괴 후, 리키아는 독립 신히타이트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리키아는 아테네의 판디온 2세의 아들인 리쿠스의 이름을 따라서 지어졌다. 고대에 영역은 한나라로 통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하게 독립적인 도시국가의 단단하게 짜인 동맹으로 남았다. 리키아는 두 존경받는 전사 사르페돈과 글라우쿠스에 의해 지휘되었다고 호머의 일리어드는 기술한다. 다른 그리이스 신화에는 리키아 왕국은 다른 사르페돈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한다. 그는 크레테에서 왔으며 미노스 왕의 형제이다. 사르페돈의 추종자들은 터밀레라 불리었으며 그들이 밀리안이라 불리는 민족을 정복후에 왕조를 창건하였다. 이 신화적인 이야기는 크레타 조직의 밀레투스의 창건과 함께 소아시아에 정착을 의미한다. 리키아는 그리이스 신화에 벨레로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데 그는 결국 리키아 왕 이오바테스(또는 암피아낙스)의 왕좌를 계승하였다. 리키아는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 아래로 왔다. 그때 메디아의 하르파구스는 키루스 대왕의 장군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정복하였다. 하르파구스의 후손이 기원전 468년까지 다스렸는데 그때 아테네가 그들을 무너뜨렸다. 그후 페르시아는 기원 387년 다시 점령하였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유지하였다. 그것은 곧 셀레우코스 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기원저 189년에는 로마 공화국에 떨어졌다.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4년에 그곳에서 피살되었다. 서기 43년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리키아를 로마제국의 속주로 병합하며 그것을 팜필리아와 통합하였다. 리키아는 결국 그리이스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어 터키의 일부가 되었다. 리키아는 트리밀리라는 이름을 지니는데 그것은 파타라 발굴에서 고대 도로 표지판에 발견되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의 디르밀이라는 터키 마을이 고대의 트리밀리 즉 리키아로 판명되었다. 2세기의 대화록 에로테스는 리키아가 그들의 기념비보다는 그들의 이전 영광을 포함하므로 역사가 흥미롭다고 하였지만 리키아의 유적에서 많은 유물들이 특히 그들 특유의 절벽 측면의 바위를 깍아만든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리키아는 여신 레토와 그녀의 쌍둥이 아이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숭배의 중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