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읍성(靈光邑城)은 고려시대의 우산성(牛山城)과 조선시대의 성산성(城山城)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산성에 대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광읍의 남쪽 우산공원(牛山公園) 뒷 편에 자리했다. 지금도 고성(古城․우산성) 터에는 크고 작은 성돌과 고가(古家)의 기왓장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영광 사람들은 이 언덕을 ꡐ고성재ꡑ라고 부르고 있다. 영광 우산성이 영광 성산성으로 옮겨진 유래는 신숙주의 '순방기문(巡訪記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성(우산성)은 성보(城堡)가 낮고 축성 후 보수를 소홀히 하여 성이 무너지고 공청(公廳)이 비좁다는 이유를 들어 1452년 영광군민들이 조정에 이건(移建)을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축성을 시작, 4년만인 1456년 민효원(閔孝源) 군수에 의해 성(城)을 완공 시켰다. 높이 6척(1.8m), 길이 1만4천69척(4천407m)으로 쌓여진 영광읍성은 4개의 문(東․西․南․北門)을 위시해 공청(公廳), 객사(客舍), 우물 9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영광 읍성(靈光邑城)은 고려시대의 우산성(牛山城)과 조선시대의 성산성(城山城)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산성에 대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광읍의 남쪽 우산공원(牛山公園) 뒷 편에 자리했다. 지금도 고성(古城․우산성) 터에는 크고 작은 성돌과 고가(古家)의 기왓장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영광 사람들은 이 언덕을 ꡐ고성재ꡑ라고 부르고 있다. 영광 우산성이 영광 성산성으로 옮겨진 유래는 신숙주의 '순방기문(巡訪記文)'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성(우산성)은 성보(城堡)가 낮고 축성 후 보수를 소홀히 하여 성이 무너지고 공청(公廳)이 비좁다는 이유를 들어 1452년 영광군민들이 조정에 이건(移建)을 건의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축성을 시작, 4년만인 1456년 민효원(閔孝源) 군수에 의해 성(城)을 완공 시켰다. 높이 6척(1.8m), 길이 1만4천69척(4천407m)으로 쌓여진 영광읍성은 4개의 문(東․西․南․北門)을 위시해 공청(公廳), 객사(客舍), 우물 9개가 있었다고 전한다. 여지도에 나타난 영광읍성을 보면 동문(東門)은 빈양루(賓暘樓)라 하여 현 영광여중 자리에 있었고, 서문은 정서문(靜西門)이라 하여 영광 농업기술센터 뒤에 있었다. 남문은 진남루(鎭南樓)라 하여 영광우체국 앞에 있으며,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여 영광읍 무령리 북문재 옛 도로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