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읍성은 대구의 읍성이였다. 지금의 도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당시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대구에는 둘레 2.6km,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방패 모양을 한 대구읍성이 존재했다. 동성로는 1907년 헐린 대구읍성 동쪽에 위치한 도로여서 붙은 이름이다. 동성로는 친일파 박중양의 농간으로 1907년 대구부 28개동의 시민들이 할당해서 철거하게 된 대구읍성의 동쪽 성곽이었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자리 잡고 있는 대구읍성은 1590년 선조23년에 처음 만들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허물어진다. 왜군의 후방보급로로서 중병(重兵)을 주둔시켜 대구읍성은 완전히 왜군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대구 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외관은 일반교회건물처럼 중앙에 돌출된 종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석재로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남은 성돌을 사용하여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계성초교 오르막 입구. 이곳 바닥석은 대구읍성 성돌 2000여 개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중구 제공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 사업이 본격화된다.
대구 읍성은 대구의 읍성이였다. 지금의 도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당시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대구에는 둘레 2.6km, 높이 5m의 성벽으로 둘러쌓인 방패 모양을 한 대구읍성이 존재했다. 동성로는 1907년 헐린 대구읍성 동쪽에 위치한 도로여서 붙은 이름이다. 동성로는 친일파 박중양의 농간으로 1907년 대구부 28개동의 시민들이 할당해서 철거하게 된 대구읍성의 동쪽 성곽이었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자리 잡고 있는 대구읍성은 1590년 선조23년에 처음 만들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때 허물어진다. 왜군의 후방보급로로서 중병(重兵)을 주둔시켜 대구읍성은 완전히 왜군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대구 계성학교 아담스관, 대구읍성 성돌이 남아 있는 건축물이다. 외관은 일반교회건물처럼 중앙에 돌출된 종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석재로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남은 성돌을 사용하여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계성초교 오르막 입구. 이곳 바닥석은 대구읍성 성돌 2000여 개가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 중구 제공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 사업이 본격화된다. 대구읍성은 조선시대 경상감영을 중심으로 대구를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었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훼손됐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행정·군사중심지였던 대구읍성이 다시 복원된다. 대구 중구는 도심 관광·문화자원 개발을 위해 ‘대구읍성 상징거리 조성사업’을 벌인다고 2011년 9월 21일 밝혔다. 분류:대구의 산성 분류:읍성 분류:대산성 분류:구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