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칼리굴라 [Caligula] 는 로마의 제3대 황제, 37년 즉위한 직후에는 민심 수습책으로 환영받았으나, 점차 재정의 낭비와 잔혹한 독재 정치로 원로원과 대립하고 인심을 잃어 41년에 암살되었다. 서기 37년,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황실 유지에 따라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맨 처음 선황에 의해 숙청된 원로원 의원들을 복권시키고 여러 인기정책들을 남발했다. 이것은 실리는 추구하나 호감을 얻지 못하는 티베리우스와 대비되어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해 10월, 큰 병을 앓고 난 이후 그는 딴사람으로 변해있었다. 그의 혈액속에 잠재된 검은피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검은피의 핵이 그 광기를 휘둘렀으니 이제 로마의 불행은 불을 보듯 뻔했다. 칼리굴라는 먼저 황실 근위대장인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를 처형했다. 그는 자신이 황제로 즉위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후원자까지 의심한 것이다. 이어서 선황의 손자로 다음 후계자가 되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없애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누이동생 드루실라가 죽자 태연하게 그녀를 신격화하기도 했다. 한편,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아그리피나는 예전부터 오빠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피두스와 불륜 관계였는데, 그는 칼리굴라가 가장 총애하던 미남 청년이었다. 그녀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평소부터 미워하고 있던 오빠를 없애고자 했다. 레피두스를 성의 포로로 만든 그녀는 칼리굴라의 암살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리굴라의 안테나에 미리 걸린 레피두스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아그리피나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로칠레이아 해의 조그만 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녀는 유배지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바로 몸. 그녀는 그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수영을 하기 시작한다. 남들이 복수를 위해 칼을 갈 때, 그녀는 쉼없는 수영으로 자기기록을 경신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은 더욱 아름다워져 마치 비너스를 연상시켰다. 칼리굴라의 기행은 점점 스케일이 커지고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겠다며 로마를 발칵 뒤집어 놓더니 해안에 초호화 유람선 두 척을 띄워 국가재정을 파탄으로 몰아갔다. 그는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황실 물건을 경매에 부치기 시작했고, 이것마저 여의치 않자 전쟁을 통해 속주세와 전리품으로 이를 충당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실행한 두 차례의 원정은 모두 재정부족으로 깡통만 차고 왔다. 39년에 라인 강변까지 진군한 그가 한 일은 측근 두 명에 대한 처형 뿐이었다. 이때 죽은 사람은 드루실라의 전남편이자 매제인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였고 또 한 사람은 라인강 상류 주둔군 지휘관인 그나이우스 렌툴루스 카이툴리카스였다. 그리고 서기 40년에는 브리타니아까지 군사를 이끌고 침공하더니 해안가에서 병사들에게 조개껍질을 줍게하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는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렇게 두 차례의 원정을 뻘짓으로 망친 그는 로마인들로부터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리피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예감했다. 한편, 조개껍질과 관련하여 가장 우스운 일화로 회자된 이 사건은 다음과 같았다. 칼리굴라가 게르만 지역에서 블로뉴 항구 외곽지역으로 이동했을 때의 일이다. 해안에 병사들을 주둔시킨 그는 기력이 빠질대로 빠져 불안해 하는 그들을 해변에 정렬시켰다. 로마의 궁병들은 영문도 모른채 물가에 횡대로 도열하였고 거대한 투석기들이 모래 언덕으로 옮겨지고 기마부대 전원이 측면에 배치되었다. 모든 병사들의 눈은 수평선에 고정되어 멀리서 몰려오는 가상의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칼리굴라는 위엄있는 황제의 모습으로 몸을 일으켜 얕은 물 속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검을 뽑은 다음, 피를 얼어붙게 만드는 냉혹한 목소리로 바다의 신 넵툰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칼리굴라가 검으로 파도 거품을 베자 보병대가 얕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창을 휘둘렀고, 그 뒤를 이어 기마병들이 파도를 타며 물 속을 들락날락했다. 드디어 승리를 예감한 칼리굴라가 외쳤다. "마음껏 약탈하라!"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바다에서 희희낙낙거리며 '노략질'을 시작했고 마침내 투구에 조개를 가득 담아 칼리굴라의 영웅적인 승리의 전리품으로 가져 왔다. 이렇게 강력한 로마 군대는 실성한 황제 때문에 한 순간 어릿광대가 되어야만 했다.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칼리굴라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누이 동생들의 재산을 노리고 국가 반역죄로 고발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원로원과 유력자들을 차례로 고발하여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로마는 체포, 투옥, 고문, 추방 등으로 공포시대를 맞이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로마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민족이었는데, 이를 괘씸히 여긴 로마인들이 유대인들보다 그리스 상인들을 더 우대하였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상권을 위협받은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 반대 세력이었던 그리스인들이 수적 우세를 믿고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로마 담당관은 그리스편을 들어 유대인을 더욱 탄압하는데 동조했다. 그러자 유대인 대표인 필로가 그리스인 대표와 함께 칼리굴라를 접견했으나, 이를 귀찮게 여긴 황제는 오히려 필로를 유대인이라고 조롱하더니 예루살렘 신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유대인들이 총궐기에 들어갔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총독은 이를 온건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칼리굴라는 강경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자결명령을 내렸다. 칼리굴라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국고충당이었다. 그렇게 되면 예전처럼 검투사 시합 등을 열어 실추된 인기를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돈을 긁어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만만한 동맹국의 재산을 노렸다. 그는 갑자기 마우레타리아 왕을 소환하더니 곧바로 살해하고 그 땅을 속주로 선포했다. 이것은 당연히 현지인들의 불만을 샀고 오히려 거대한 반란을 불러왔다. 칼리굴라는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이제는 서민들의 코묻은 돈까지 욕심을 냈다. 그는 곧바로 갖가지 명목으로 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허리가 휜 시민들이 반발하자 근위병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을 지시했다. 이에 원로원과 시민 모두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근위대장 카이레아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를 바라보는 카이레아의 심정도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카이레아는 과거 황제의 아버지였던 게르마니쿠스에게 목숨바쳐 충성했던 인물이다. 칼리굴라가 그를 신임하여 근위대장으로 임명했을 때만 해도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50대에 접어든 카이레아는 칼리굴라를 아버지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내 자식이 저랬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결국 카이레아는 고민끝에 칼리굴라를 없애기로 했다. 서기 41년, 마침내 칼리굴라는 팔라티누스 경기장에서 그에게 참살되었다. 이때 현장에 같이 있었던 아내 카이소니아와 딸도 동시에 살해되었다. 변고가 전해지자 그의 삼촌이었던 클라우디우스는 궁전에서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그러자 황급히 그를 찾아낸 카이레아가 그에게 무릅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써 소아마비를 앓았던 클라우디우스가 얼떨결에 4대 황제로 옹립된다. 이윽고 움추리고 있던 검은피, 아그리피나가 날개를 펴게 된다. 분류:로마의 황제 분류:칼리 분류:토르 분류:클라우디우스 분류:카이사르 분류:가이우스 분류:게르마니쿠스 분류:아우구스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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