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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트문크 다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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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트문크 다얀칸(1464년-1543년)은 북원의 대칸(재위:1470 – 1517)이었다. 만두굴 칸이 죽었을 때, 만두하이가 서른 한 살이었고, 바트 멍흐는 여섯 살이었다. 쿠빌라이 자손들이 거의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는 상황에서 바트 멍흐는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귀한 황손이었다. 다시 말하여 바트 멍흐는 당연히 칸 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바트 멍흐는 아버지(볼후 진왕)사후 재혼한 생모로부터도 천대를 받는 버려진 아이가 되고 마는데, 이 아이를 거두어 돌보아 준이가 바로 만두하이였다. 만두하이는 칭키스칸의 직계자손이 거의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칸의 자리를 이어갈 사람은 바트 멍흐뿐이라고 판단을 하고, 바트 멍흐를 극진하게 돌보는 한편, 동몽골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어 바트 멍흐를 정식 칸으로 추대하였다. 만두하이는 어린 다얀 칸을 키워가면서 섭정으로서 동몽골을 다스렸다. 다얀 칸이 성장하자 만두하이는 1481년, 만두하이가 마흔두 살 때, 다얀 칸이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하였다. 바트몽케는 명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그가 교역 개방을 위해 보낸 사절은 중국 황제에의해 피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나라로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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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트문크 다얀칸(1464년-1543년)은 북원의 대칸(재위:1470 – 1517)이었다. 만두굴 칸이 죽었을 때, 만두하이가 서른 한 살이었고, 바트 멍흐는 여섯 살이었다. 쿠빌라이 자손들이 거의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는 상황에서 바트 멍흐는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귀한 황손이었다. 다시 말하여 바트 멍흐는 당연히 칸 위를 계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바트 멍흐는 아버지(볼후 진왕)사후 재혼한 생모로부터도 천대를 받는 버려진 아이가 되고 마는데, 이 아이를 거두어 돌보아 준이가 바로 만두하이였다. 만두하이는 칭키스칸의 직계자손이 거의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칸의 자리를 이어갈 사람은 바트 멍흐뿐이라고 판단을 하고, 바트 멍흐를 극진하게 돌보는 한편, 동몽골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어 바트 멍흐를 정식 칸으로 추대하였다. 1470년, 몽골족의 영웅 칭키스칸의 가묘가 있는 성지나이만 차강게르 앞에서 성대한 취임식이 열렸는데 바로 바트 멍흐가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바트 멍흐는 다얀 칸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다얀이란 바로 大元을 의미한다. 그 이름 속에 어린 칸을 앞세워 칭기스칸의 가문을 다시 부활하겠다는 만두하이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칭키스칸의 가묘 앞에서 치러진 취임식은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몽골인들의 힘을 한곳으로 모아 옛 선조의 영화를 재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만두하이는 어린 다얀 칸을 키워가면서 섭정으로서 동몽골을 다스렸다. 다얀 칸이 성장하자 만두하이는 1481년, 만두하이가 마흔두 살 때, 다얀 칸이 열일곱 살 때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십오 년의 연상인 만두하이는 다얀 칸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아들을 낳았다(세 쌍둥이 포함). 만두하이가 낳은 이 일곱 명과 다얀 칸의 후비가 낳은 네 명의 아들 도합 열한명의 아들들이 이후 칭키스칸 가계의 새로운 몽골족을 탄생시켰다. 만두하이는 이십오 년이나 연하인 남편을 키워 몽골역사에 남을 칸으로 만들었고, 아들들 역시 제대로 키워 칭키스칸의 가문을 부활시켰다. 이런 점에서 만두하이는 칭키스칸의 모친 호엘룬과 비교된다. 만두하이는 다얀 칸의 아내였지만, 다얀 칸에게는 어머니의 다름이 없었다. 특히 만두하이는 어린 칸을 키우면서 다얀 칸이 몽골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하여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만두하이는 오이라트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다음 몽골초원에서 동몽골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다음 장성한 다얀 칸에게 몽골의 통치권을 넘겼다. 카르친의 이브라이 타이시가 그의 지위를 대체하기위해 보내어진 바트몽케의 아들 울루스볼트를 죽이자 그는 보복으로 서부 몽골을 공격하였지만 우리안카이가 이브라이에 가세하여 실하였다. 바트몽케는 명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였다. 그가 교역 개방을 위해 보낸 사절은 중국 황제에의해 피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명나라로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수년후 그는 카르친과 우리안카이 반란군을 부셨다. 그리고 그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타얀 칸 또는 대칸으로 선언하였다. 몽골문헌에 따르면 그와 만두하이의 치세는 평화로웠다. 그의 아들은 종족의 부족장들이 되었다. 알탄칸, 링단칸 등의 많은 몽골왕자들이 그의 후손이었다. 그는 몽골의해 튀멘(십만)으로 인식되었다. * 좌현: 할하, 차하르와 우리안하이 * 우현: 오르도스, 튀메드와 용시예뷔 * 기타: 옹그리구드, 외지예드, 아수드와 카르친 다얀 칸과 그의 후계자는 차하르 튀멘(십만)을 직접이끌었다. 명나라 학자들은 그를 성스러운 황제로 몽골제국의 이전 영광을 회복하였다고 고려하였다. 알탄칸은 그의 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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