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3세 (그리스어:Κωνσταντίνος Γ', 612년 5월 3일 - 641년 5월 25일)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유도키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이복 형제인 헤라클로나스와 함께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으나 불과 석 달을 통치하고 죽었다. 단독 황제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인 헤라클리우스(613~) 및 형제 헤라클로나스(638~)와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 계모인 마르티나와 그녀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헤라클로나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단독으로 차지해야 할 제위를 나누어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아버지 황제의 묘를 파헤쳐 그의 시신에서 제관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제위에 오르기전 아바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함께 성공적으로 수도의 방위를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몸이 약했고 제위에 오른 지 불과 3개월 만에 요양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칼케돈에 가 있다가 죽었다. 계모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1.
* 넘겨주기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 (그리스어:Κωνσταντίνος Γ', 612년 5월 3일 - 641년 5월 25일)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유도키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이복 형제인 헤라클로나스와 함께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으나 불과 석 달을 통치하고 죽었다. 단독 황제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인 헤라클리우스(613~) 및 형제 헤라클로나스(638~)와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 계모인 마르티나와 그녀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헤라클로나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단독으로 차지해야 할 제위를 나누어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아버지 황제의 묘를 파헤쳐 그의 시신에서 제관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제위에 오르기전 아바르족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을 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와 함께 성공적으로 수도의 방위를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몸이 약했고 제위에 오른 지 불과 3개월 만에 요양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 칼케돈에 가 있다가 죽었다. 계모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증거는 없다. 407년 브리튼 주둔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콘스탄티누스 3세가 더 많은 군대를 갈리아 지방으로 철수시키자 섬에 남은 병력으로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브리튼인들은 정통 황제인 호노리우스에게 호소했으나, 황제는 원군을 파견할 수가 없었고, 다만 자체 방어할 권한을 브리튼 각 도시에 부여하는 데 그쳤다(410). 이것으로 로마인의 브리튼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의해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때 부터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부정되고 탄압되었다. 1.
* 넘겨주기비잔티움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