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쿠루핀은 페아노르의 아들이다. 페아노르의 아들들이 실마릴을 추구하며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들 자신이 실마릴을 탐냈기 때문이 아니라, 일루바타르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다만 일곱 명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그들 중 일부는 진심으로 실마릴을 욕망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때 그 사례로 들었던 것이 바로 켈레고름과 쿠루핀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켈레고름과 쿠루핀은 페아노르 가문에서도 강경파에 속하는 이들로서, 핀로드가 실마릴을 찾으러 가겠다고 선언하자 곧바로 그와의 우정을 배신해버린 경력도 있고, 실마릴을 구하러 가던 루시엔을 속여서 납치 감금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제2차 동족살상에서 도리아스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것도 그들이었다.(어떤 전승에 따르면 디오르를 죽인 것도 켈레고름의 소행.) 단순히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행위들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일을 벌이고 다니기는힘들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그들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켈레고름과 쿠루핀 형제에게 실마릴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고 생각한 근거는 나르고스론드에서 그들이 외친 연설이었다.「벗이든 적이든, 모르고스의 악마든, 엘프이든, 인간의 자손이든, 그 이외 아르다에 살고 있는 어떤 것이든 간에, 실마릴을 찾거나 빼앗아 소유하려 한다면, 법도 사랑도 지옥의 동맹도, 발라의 권능도, 그 어떠한 마법의 힘도, 그를 페아노르 아들들의 집요한 증오로부터 결코 그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실마릴은 오직 우리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칼까지 뽑아들며 소리친 켈레고름의 선언과, 그 뒤를 이은 쿠루핀의 웅변 말이다. 마치 페아노르의 맹세를 그대로 본따 옮겨놓은 듯한 이 문구를 즉석에서 속사포처럼 외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새긴 채 생활했다는 증명이 된다. 일반적인 견해는 페아노르 가문의 강경파를 켈레고름, 카란시르, 쿠루핀의 삼형제로 분류하며 나도 그것을 지지했었지만, 사실 난 지금은 카란시르를 거기 포함시켜야 하는지도 다소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쪽이다. 카란시르는 성질머리가 더럽고 자존심이 굉장했다 뿐이지 실마릴에 집착했다는 근거는 기록상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마릴에 대한 태도에만 국한해서 본다면, 강경파는 카란시르보다는 오히려 마에드로스일지도 모르겠다. 마에드로스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도자로서 냉철한 이성과 책임감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으며, 제2차 동족살상은 분명 맹세를 지키기 위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위였다고 본다.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슬퍼하며 실종된 두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직접 숲을 헤매다녔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생애 말년으로 갈수록 실마릴에 대한 그의 자세는 맹세 수호보다는 개인의 집착과 갈망을 점점 닮아 간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실마릴을 얻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마에드로스는 실마릴을 찾는 과정에서 네 명이나 되는 동생들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고,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도 스스로 포기했으며, 놀도르 군주로서의 명예도 지위도 업적도 모두 동족살해자라는 오명 속에 묻혀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을 상실하고 나니 결국 실마릴은 그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이자 삶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모 팬픽을 인용하자면 '마에드로스는 죽었다. 여기 있는 것은 실마릴에 미친 괴물일 뿐이다.' 쓰면서 보니, 마에드로스 이 녀석 정말 가슴이 시리도록 안쓰럽구나;;; 삶의 유일한 목표였던 그 보석을 드디어 획득했는데 그게 자기 손을 불태울 때 기분이 어떠했을지. 말하자면 인생을 송두리째 바쳤던 대상에게 배신당한 것 아닌가. 실마릴을 움켜쥔 채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그 보석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며 하나둘씩 죽어나갔던 페아노리안들의 장남으로서 확실히 어울리는 최후였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허탈하고 좌절스러운 최후이기도 하고 말이다. 성급한 카란시르나 막내 암로드는 당장 형을 구출하기 위해 앙그반드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켈레고름과 쿠루핀은 우리는 모르고스를 너무 얕본 탓에 이미 아버지와 큰형을 빼앗겼으니 앞으로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자인 마글로르는 그 두 의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기록을 볼 때 결국 그들은 모르고스의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고 마에드로스의 구명 시도를 하지도 않는다는 일종의 중립책을 택했지만....... 페아노르 가문으로서는 꽤나 굴욕적인 선택이었겠지. 맏형이자 가문의 지도자가 사로잡혀 있는데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 빨며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라니. 나중에 핀곤이 혼자 힘으로 마에드로스를 구해왔을 때 동생들의 표정은 꽤나 장관이었을 듯하다.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막 마에드로스 눈치보면서 "아니 그러니까 형 그게 말이지ㅠㅠ;;; 우리가 형을 포기하려던 건 아니고ㅠㅠ 우리도 진짜로 구하려고 했는데 그 상황이 그....... 엉엉엉. 무사히 돌아와줘서 정말 기뻐. 엉엉엉엉" 어쩌면 마에드로스가 핀골핀에게 왕위를 넘겼을 때 동생들이 이에 반대하면서도 그것을 대놓고 표출하지는 못했던 것은 이 사실에 대한 자괴감도 있지 않았을까. '핀골핀 가문의 장남이 혼자 앙그반드에 침입하면서까지 형을 구하는 동안, 우리는 대체 뭘 했는가?'라는 죄의식 말이다. 특히 자존심 센 카란시르는 그 왕위 상납에 불만이 많았을 텐데, 막상 그 결정을 내린 큰형한테는 미안해서 제대로 대들지도 못 하고, 그렇다고 상급왕이 되어버린 핀골핀 가문에게 반항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애꿎은 피나르핀 가문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카란시르가 버럭거린 발언을 분석해 보면, 싱골도 싱골이지만 일단은 하프 놀도르에 불과한 피나르핀의 아들들이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기분나쁘다는 요지가 아니던가. 말하자면 "우리가 놀도르 상급왕 자리 뺏겼다고 피나르핀 가문까지 우릴 무시하냐ㅠㅠ 놀도르 세 가문 중에서 순수혈통 놀도르는 우리뿐이란 말야 이 바냐르 혼혈들아!" 하는 식의 감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저런 생각들을 하며 실마릴리온을 페아노리안 관련 부분들만 발췌해서 재독 중인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동안 책상에 머리를 팡팡 박으며 발작을 일으켰다. 쿠루핀, 너 루시엔을 죽이려고 했었냐?!!! 앜ㅋㅋㅋㅋ 에루여ㅋㅋㅋ 내가 실마릴리온을 도대체 몇 번째 읽는 건데 왜 저 문장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까. 이건 납치하고 감금하는 정도의 레벨이 아니잖아. 맙소사, 죽이려고 했다고! 무려 루시엔을! ㅋㅋㅋㅋ아오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켈레고름 쿠루핀 형제가 숲 속에서 베렌 루시엔 커플을 만나서 한동안 드잡이질을 벌였을 때, 그리고 결국 후안이 배신하는 바람에 켈레고름 쪽이 패배해서 말을 타고 도망치려고 할 때, 그 때 쿠루핀은 말 위에서 루시엔을 향해 활을 쏘았다. 다행히 첫발은 후안이 뛰어올라 화살을 입으로 물었고, 그 다음 화살은 베렌이 뛰어들어 대신 맞아주었기 때문에 루시엔에게는 아무런 해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건 명백히 살인이다. 아무리 수치와 모욕감으로 들끓고 있는 상황이었다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등 뒤에서 상대방을 쏘아 죽여버리자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엘프가 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여자를. 게다가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처녀를. 게다가 싱골 왕의 외동딸이자 도리아스의 사랑받는 왕녀를. 물론 쿠루핀이 활을 쏜 것이 단순히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라는 이유만은 아니었겠지. 켈레고름과 쿠루핀은 루시엔 때문에 가진 것을 다 잃고 쪽박을 쓴 상태였으니 말이다. 기껏 눈앞에 있는 나르고스론드의 왕관도 도로 빼앗겼고, 이제까지 살아왔던 땅에서도 쫓겨났고, 백성들도 전부 떠나버렸고, 외아들인 켈레브림보르까지도 연을 끊었고, 심지어 사냥개 후안과 칼 앙그리스트까지도 강탈당했다. 하지만 얘들아.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애초에 너네들이 루시엔을 속이고 납치했기 때문이잖아ㅋㅋㅋㅋ 실패해서 화가 나긴 하겠지만, 그 상황에서 떠올리는 것이 저주나 슬픔이나 증오 같은 '중간계 제1시대 엘프다운' 발상이 아니라 냉큼 살인이라니 쿠루핀 이 녀석의 사고회로는 대체 무슨 구조란 말인가. 차라리 베렌을 죽이려고 한 것은 이해할 수도 있다. 베렌은 인간인 데다 천애고아라서 복수해도 별다른 뒷탈이 없는 상대니까. 하지만 루시엔은 같은 동족인데다 상급왕 싱골의 딸이고 도리아스의 왕녀다. 이건 실마릴을 위한 동족살상도 뭣도 아니고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살해잖아. 게다가 루시엔이 죽어버리면 외교적인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ㅠㅠㅠ 베렌과 후안까지 다 없애고 증거인멸할 생각이었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아아아. 이 페아노르 가문은 정말 파고 팔수록 놀라운 사람들이로다. 이로써 쿠루핀에 대한 내 평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사실 지금까지 쿠루핀이 아버지 페아노르를 가장 빼닮은 아들이라느니, 그래서 이름도 '작은 아버지'라느니, 페아노르가 가장 총애한 자식이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거의 실감이 나지 않았거든. 쿠루핀은 역사를 통틀어 그다지 특별한 업적도 없었고 기록된 행적들도 모두 독자적인 일이 아니라 다른 형제와 함께 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아들 켈레브림보르에게 페아노르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한 징검다리로서의 설정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쿠루핀은 레알 진성 페아노르의 후계자가 맞다. 이런 막강한 놈 같으니. 페아노르가 제1차 동족살상을 저지른 것이 맹세 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배가 필요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놈 진짜 막장 엘프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를 판에 박은 아들이 여기 있었다. Oh God. These Feanorian boys never stop amazing me. 덧. 이게 생각할수록 기막힌 것이, 루시엔은 모르고스나 심지어 만도스조차도 녹여버릴 정도로 절세미녀다. 그래서 켈레고름과 사냥개 후안도 그 미모에 넘어갔었고 말이다. 하지만 쿠루핀에게는 전ㅋ혀 통하지 않아ㅋㅋㅋ 루시엔을 눈앞에서 봤으면서도 쿠루핀은 하나도 매혹되었다는 기록이 없길래, 단순한 취향 차이이거나 아니면 친형 켈레고름이 좋아하는 여자니까 자기가 물러선다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이놈이 진짜 목석이었던 거다. 대체 세상의 어떤 남자가 아름다운 루시엔에게 활을 쏠 수 있겠느냐고.(데굴데굴) 켈레고름도 베렌만 건드렸지 루시엔한테는 손댈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다. 분류:핀 분류:쿠루 분류:고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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