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읍(岐邑)은 고공단보가 도읍해 주문왕대까지 기산에 세운 도읍으로 지난 수십 년간 중국 고고학자의 주요한 관심거리였다. 주씨(周氏) 부락의 우두머리 고공희단보(古公姬亶父)가 빈읍에서 기읍(岐邑)으로 옮겼다. 빈(邠)은 지명(地名)으로 여기서 기읍(岐邑)까지는 약 250여리(二百五十餘里)인데, 그 중간(中間)에 양산(梁山)이 있었다. 태왕이 있었던 기읍(岐邑)이란 곳은 험난한 오랑캐인 융적(戎狄)의 사이에 있어, 겨우 자신만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삭방(朔方)은 황토지대인 경수와 낙수의 북쪽지대를 말하였으며 유(幽=幽州)는 서주 시대엔 기 (岐=岐邑)의 북쪽인 낙수(洛水) 상류 북쪽에서 소여기(昭余祁)의 북방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도읍을 삼았던 곳으로 역사에서는 이곳을 기읍(岐邑)이라고 불렀다. 주원 박물관은 주원 유적지의 대규모 발굴이 있은 후 1988년에 세워졌다. 기읍 [畿邑] 은 예전에, 경기도 안의 고을을 이르던 말이다.
기읍(岐邑)은 고공단보가 도읍해 주문왕대까지 기산에 세운 도읍으로 지난 수십 년간 중국 고고학자의 주요한 관심거리였다. 주씨(周氏) 부락의 우두머리 고공희단보(古公姬亶父)가 빈읍에서 기읍(岐邑)으로 옮겼다. 빈(邠)은 지명(地名)으로 여기서 기읍(岐邑)까지는 약 250여리(二百五十餘里)인데, 그 중간(中間)에 양산(梁山)이 있었다. 태왕이 있었던 기읍(岐邑)이란 곳은 험난한 오랑캐인 융적(戎狄)의 사이에 있어, 겨우 자신만을 보존할 수 있었다. 삭방(朔方)은 황토지대인 경수와 낙수의 북쪽지대를 말하였으며 유(幽=幽州)는 서주 시대엔 기 (岐=岐邑)의 북쪽인 낙수(洛水) 상류 북쪽에서 소여기(昭余祁)의 북방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도읍을 삼았던 곳으로 역사에서는 이곳을 기읍(岐邑)이라고 불렀다. 주원 박물관은 주원 유적지의 대규모 발굴이 있은 후 1988년에 세워졌다. 기읍 [畿邑] 은 예전에, 경기도 안의 고을을 이르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