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트 피플(Boat Peaple)은 베트남 난민들이었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갈 곳을 잃고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선상난민(船上難民)을 일컫는 말이다. 국외로 탈출한 베트남인은 대략 400만~500만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바다로 탈출한 사람만도 150만명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반동 분자라는 혐의로 곧바로 체포돼 수용소에서 재교육을 받고 풀려났다. 미국인 또는 미국과 관계된 기관에서 일했거나 공무원(군인·경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낡고 조그만 목선(木船)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거센 풍랑에 침몰되거나 해적의 약탈에 희생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겪었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로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보트 피플(Boat Peaple)은 베트남 난민들이었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 이후 갈 곳을 잃고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선상난민(船上難民)을 일컫는 말이다. 국외로 탈출한 베트남인은 대략 400만~500만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바다로 탈출한 사람만도 150만명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부분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반동 분자라는 혐의로 곧바로 체포돼 수용소에서 재교육을 받고 풀려났다. 미국인 또는 미국과 관계된 기관에서 일했거나 공무원(군인·경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은 낡고 조그만 목선(木船)을 타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거센 풍랑에 침몰되거나 해적의 약탈에 희생당하는 비참한 운명을 겪었다.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로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 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 피플(Boat Peaple)이라 불리우는 베트남 난민들이었다. 베트남으로부터의 탈출 행렬은 1975년의 베트남 공산화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70년대 말까지 벌어진 인도차이나 전쟁의 여파로 인해 계속되었다. 즉 캄보디아 내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과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그리고 이를 응징하기 위한 중국의 베트남 침공으로 인하여 수십만의 난민이 추가로 발생하였다. 당시 특히 북부 베트남에 살고 있던 약 25만명의 중국계 베트남인들이 중국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인도차이나 반도는 전쟁의 혼란에서 벗어나 서서히 정치적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공산 베트남 치하를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탈출 보트 피플의 행열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