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국[孤竹國]은 중국 은나라의 제후국 중의 하나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및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동이 민족의 서방 진출의 전초 기지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천년 가량 존속하였다. 은말주초, 주나라 무왕이 폭군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동북지역에 있는 고죽국(孤竹國)에는 백이숙제는 고죽군의 두아들이였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죽군은 둘째 아들 숙제를 계승자로 세웠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막내인 숙제가 형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자, 백이는 부왕의 뜻이라며 사양하다가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 형제는 어질고 예의를 겸비한 왕이 은을 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말려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갔다. 주 무왕이 등극하자 묵태씨를 보내어 천자 자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여 주었다. 이 묵태씨가 바로 고죽국의 왕성(王姓)이다. 즉 고죽군(孤竹君)의 성씨이다.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다.
고죽국[孤竹國]은 중국 은나라의 제후국 중의 하나였다. 청구국 서쪽인 난하 및 산해관 서방에 위치하여 동이 민족의 서방 진출의 전초 기지였던 고죽국(孤竹國)이 천년 가량 존속하였다. 은말주초, 주나라 무왕이 폭군 주왕(紂王)을 토벌할 때 동북지역에 있는 고죽국(孤竹國)에는 백이숙제는 고죽군의 두아들이였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죽군은 둘째 아들 숙제를 계승자로 세웠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막내인 숙제가 형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자, 백이는 부왕의 뜻이라며 사양하다가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 형제는 어질고 예의를 겸비한 왕이 은을 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말려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주나라 곡식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갔다. 주 무왕이 등극하자 묵태씨를 보내어 천자 자리에 오른 것을 축하하여 주었다. 이 묵태씨가 바로 고죽국의 왕성(王姓)이다. 즉 고죽군(孤竹君)의 성씨이다. 21세 소태 단군 48년(BC 1286년)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東海)의 해변가에 살며 밭갈기에 힘써 스스로 살아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664년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함께 연나라를 지나 영지, 고죽국을 정벌하였다.기원전 651년 제나라 환공이 산융, 리지(離支), 고죽을 정벌하였다.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다. 수서에 따르면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의 땅이다. 주나라가 기자를 봉했고 한나라가 삼군으로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