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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락(盛樂)은 대나라의 북도였고 북위 첫 수도였다. 탁발 선비는 오르도스 지역의 화림격이(和林格爾)현 북쪽에 있는 성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3세기 중엽에 탁발부는 세습화된 대인(大人)이라는 부족장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성락(盛樂)에 도읍을 두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진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탁발의로(拓拔 盧)를 대왕(代王)에 임명하여 산서 북부의 안정을 꾀하였다.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산서성 북부에서 대국(代國)을 건립하였다. 그는 여러 부락을 통합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성락(盛樂)을 북도(北都)로, 옛평성을 남도(南都)로 하여 조악하나마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새로운 평성을 폭수 북쪽에 쌓았다. 전진의 국세가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서 규는 우천(牛川)에서 구(舊)탁발부의 선비족을 규합하여 탁발부 대왕(代王)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어서 구도(舊都) 성락(盛)에 도읍을 정하였다. 탁발규는 성락(盛樂)을 북도(北都)로, 평성을 남도(南都)로 하여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398년에 다시 위왕(魏王)이라 개칭하고 평성에 도읍을 정했다. 탁발규도 후연의 수도 중산을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의 거주민 50여 만 명을 북위의 근거지였던 성락 부근에 강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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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락(盛樂)은 대나라의 북도였고 북위 첫 수도였다. 탁발 선비는 오르도스 지역의 화림격이(和林格爾)현 북쪽에 있는 성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3세기 중엽에 탁발부는 세습화된 대인(大人)이라는 부족장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성락(盛樂)에 도읍을 두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진은 이들을 회유하고자 탁발의로(拓拔 盧)를 대왕(代王)에 임명하여 산서 북부의 안정을 꾀하였다. 탁발의로(拓跋猗盧)는 산서성 북부에서 대국(代國)을 건립하였다. 그는 여러 부락을 통합해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성락(盛樂)을 북도(北都)로, 옛평성을 남도(南都)로 하여 조악하나마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새로운 평성을 폭수 북쪽에 쌓았다. 전진의 국세가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서 규는 우천(牛川)에서 구(舊)탁발부의 선비족을 규합하여 탁발부 대왕(代王)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어서 구도(舊都) 성락(盛)에 도읍을 정하였다. 탁발규는 성락(盛樂)을 북도(北都)로, 평성을 남도(南都)로 하여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398년에 다시 위왕(魏王)이라 개칭하고 평성에 도읍을 정했다. 탁발규(拓拔珪)가 386년에 대왕(代王)에 즉위한 후, 395년에는 후연을 격파하였다.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북위를 건립할 때의 수도는 성락(盛樂)이였다. 탁발규도 후연의 수도 중산을 함락시킨 후 이 지역의 거주민 50여 만 명을 북위의 근거지였던 성락 부근에 강제 이주시켰다.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拓跋)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탁발위라고도 한다. 북위의 도읍지는 세 번 옮겼다. 첫 수도는 호화호특의 동부 지역인 성락(盛樂)이었고, 두 번째의 수도가 평성(산서성 대동大同 398-494), 세 번째의 수도가 하남성 낙양(494-534) 마지막으로 임장(534-557)이였다. 광개토 대왕은 탁발부 선비들을 주력으로 낙랑지역의 고구려인들(탁발부족들과 낙랑의 고구려인들은 이미 혼혈되어 한민족이 되어 있었다)을 이미 점령했던 성락(盛樂)지역으로 식민지 개척을 위해 대이동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삭간"은 탁발 선비의 고명칭이다. <<남제서. 위로전="위로전">>에는 "평성은 대대로 삭간의 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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