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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 동맹 (三国同盟, Dreimächtepakt)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 움직임은 1938년 여름부터 1939년 여름까지 진행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방공협정의 강화와 더불어 1940년 여름부터 삼국동맹 체결까지의 움직임, 두 부류로 나눈다. 전자는 소련에 맞서기 위한 동맹을 목적으로 했고 후자는 독소불가침 조약이 성립되자 이후 소련을 더하여 4개국에 의한 대미동맹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격렬히 저항하는 영국 본섬의 공략을 반쯤 진행시킨 상황에서 사상과 지리적으로 대립중인 소련을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 확대를 위해서는 격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소련과 몽고, 만주국의 이권다툼을 벌이던 일본과 손잡으면 일본이 대소전에 참가하면 소련군 병력이 동서로 분단되어 전쟁에서 우위에 설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외무국이 기안한 <일본, 독일, 이탈리아 제휴강화안>에는 전술한 지역이 일본의 생존권 내에 있음을 독일이 인식한다는 사항이 명기되었었다. 삼국동맹의 체결에 대해 미영화친파가 비교적 많았던 일본해군은 반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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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 삼국 동맹 (三国同盟, Dreimächtepakt)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 움직임은 1938년 여름부터 1939년 여름까지 진행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방공협정의 강화와 더불어 1940년 여름부터 삼국동맹 체결까지의 움직임, 두 부류로 나눈다. 전자는 소련에 맞서기 위한 동맹을 목적으로 했고 후자는 독소불가침 조약이 성립되자 이후 소련을 더하여 4개국에 의한 대미동맹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격렬히 저항하는 영국 본섬의 공략을 반쯤 진행시킨 상황에서 사상과 지리적으로 대립중인 소련을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 확대를 위해서는 격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소련과 몽고, 만주국의 이권다툼을 벌이던 일본과 손잡으면 일본이 대소전에 참가하면 소련군 병력이 동서로 분단되어 전쟁에서 우위에 설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이것은 히틀러의 오산으로, 중일전쟁의 격화로 인해 자원획득을 최우선으로 하던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을 피하여 히틀러가 참전을 우려했던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에 있어서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무솔리니에겐 타격이었는데 당시 이탈리아는 영국과 협상을 강하게 추진하다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수포가 되고 말았다. 또 영국과 미국의 여론도 무솔리나가 세게평화를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묘사되자 미국과 영국과 더 이상 협상은 어렵다고 생각한 무솔리는 같은 파시즘 국가로서 일본과 관계를 강화하면 아시아에서 파시즘의 영향력이 강해져 전후 세계에서 이탈리아의 발언권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에 독일과의 동맹체결도 이탈리아의 조약참가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있었는데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중이었다. 유럽전선에서 잘나가는 독일을 보고 일본정부는 독일과 손잡고 미국을 견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을 사전에 독일에 이해시킬 의도도 있었다. 실제로 외무국이 기안한 <일본, 독일, 이탈리아 제휴강화안>에는 전술한 지역이 일본의 생존권 내에 있음을 독일이 인식한다는 사항이 명기되었었다. 삼국동맹의 체결에 대해 미영화친파가 비교적 많았던 일본해군은 반발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 요나이 미츠마사는 <조약반대의 삼족오="삼족오">라고 조약추진파로부터 비아냥을 들었다. 해군은 기본적으로 조약체결엔 반대여서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을 비롯해 나가노 오사미, 오카다 케이스케, 오자와 지사부로, 스즈키 칸타로 등 육군에선 이시하라 간지등이 조약체결에 반대했다. 내각에서도 요시다 젠코 해군대신, 이시구로 타다아츠 농림대신이 반대했지만 요시다가 병으로 사임하고 후임 해군대신에 오른 오이카와 코시로가 조약찬성에 돌아서면서 반대를 눌렀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9월 19일에 어전회의에서 하라 요시미치(原嘉道) 추밀원 의장은 일본의 삼국동맹 참가를 공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일본의 동맹참여를 정당화하는 연설을 했다. <본 조약은="조약은" 미국을="미국을" 목표로="목표로" 한="한" 동맹조약으로="동맹조약으로" 이를="이를" 공표함으로="공표함으로" 인해="인해" 미국의="미국의" 구라파="구라파" 전선으로의="전선으로의" 참전을="참전을" 방지하려는="방지하려는" 이탈리아의="이탈리아의" 생각과="생각과" 같다.="같다." 미국은="미국은" 최근="최근" 영국을="영국을" 대신해="대신해" 동양의="동양의" 수호자를="수호자를" 자처하면서="자처하면서" 일본에="일본에" 압력을="압력을" 행사하고="행사하고" 있는데="있는데" 일본이="일본이" 동맹에="동맹에" 가입하지="가입하지" 않는다면="않는다면" 적수공권이="적수공권이" 될="될" 것이다.="것이다." 당연히="당연히" 조약발효에="조약발효에" 의해="의해" 일본의="일본의" 태도가="태도가" 명확함을="명확함을" 보이지="보이지" 않는다면="않는다면" 일본의="일본의" 압박강화와="압박강화와" 장제스를="장제스를" 지원하는="지원하는" 사태를="사태를" 막을="막을" 수="수" 없을="없을" 것이다.="것이다." 이탈리아에="이탈리아에" 대해="대해" 싸우지="싸우지" 않는="않는" 미국은="미국은" 일본에="일본에" 대해="대해" 경제압박을="경제압박을" 가하고="가하고" 일본에="일본에" 대한="대한" 제철수출을="제철수출을" 막는="막는" 동시에="동시에" 일본물자를="일본물자를" 수입하지="수입하지" 않고="않고" 장기간에="장기간에" 걸쳐="걸쳐" 우리="우리" 일본을="일본을" 피폐하게="피폐하게" 만들어="만들어" 전쟁수행을="전쟁수행을" 어렵게="어렵게" 할="할" 지도="지도" 모른다..="모른다.."> 1940년 9월 27일, 조약조인식은 독일의 베를린에서 거행되어 독일 외무장관인 립벤트로프, 이탈리아의 외무장관인 치아노, 일본에서는 특명전권대사인 쿠르스 사부로(来栖三郎)가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원문은 영문 텍스트로 정리되어 베를린에서 서명조인 후 약 3주 후에 일본판으로 다시 고쳐져 주일 독일대사이던 쿠리에가 이를 독일로 가져가 재서명 조인했다. 현재 이 일본판 삼국동맹 문서는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전시중이다. 에티오피아 침공에 의해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던 이탈리아는 1933년에 국제연맹을 탈퇴해 고립해있던 독일과 먼저 손잡은 후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여 1936년 10월에 베를린-로마 추축국 구상을 구축했다. 오스트리아를 자국 세력권으로 생각했던 무솔리니는 1938년 3월에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합병에 상당히 난색을 표시했었다. 하지만 1939년 4월에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합병하자 다시 영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항하기 의해 5월에 독일, 이탈리아 군사동맹조약이 체결되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소중립조약에 의하여 삼국동맹에 소련을 참가시켜 4국동맹으로 만들어 유라시아 추축권을 만들어 미국과 대항하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구상은 소련을 방문했던 마쓰오카에게 스탈린 자신이 피력한 의견이었다고도 한다. 독일의 외무장관인 립벤트로프도 같은 구상을 가졌지만 독소전에 의해 이 구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를 이유로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삼국동맹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동맹파기를 고려했지만 육군의 반발로 인해 이를 공표할 수 없었다. 1940년 11월에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공화국, 1941년에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차례로 군사동맹에 가입해왔다. 또 유고슬라비아도 1941년 3월말에 동맹에 가입했지만 가맹에 반대하는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친독정권이 붕괴하면서 가맹은 취소되었다. 한편 추축국의 일원이던 핀란드는 1940년 8월에 독일과 밀약을 맺었고 태국도 1941년 12월에 일본-태국 공수동맹조약을 맺었지만 삼국동맹에 가맹하지는 않았다. 만주국은 군사적으로 일본의 괴뢰정권이라 삼국동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방공협정엔 가입했지만 끝내 삼국동맹에는 참가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전쟁 개전직전에 쿠르스 사부로는 대미강화의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대사를 보좌했다. 그러나 쿠르스는 삼국동맹의 조인자여서 오히려 미국측의 반감만 자극하여 대미교섭은 불발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삼국동맹 체결을 기념하여 일본이 만든 포스터에는 히틀러, 고노에 후미마로(당시 수상), 무솔리니의 얼굴이 나란히 들어가있다. 동맹조약의 원문에 의하면 어느 한 국가가 현재 자국과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경우에 한정하여 상호원조의무가 있었다. 이 때문에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이 소련에 선전포고하면서 독소전이 시작되었어도 일본은 소련과 중립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공격당시 상호원조 조약이 발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12월 11일에 미국에 선전을 포고했다. 그 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세 나라는 단독 불강화협정을 체결하고 동맹관계를 강화했다. 연합국도 이와 동시에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세계는 두 개의 동맹에 의한 전쟁상태로 돌입했다. 하지만 합동참모회의 등을 설치하여 긴밀하게 연락을 취한 연합국에 반해 추축국은 전략에 대한 토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소련, 미국에 대한 산전포고는 사전에 통지되지 않았기에 그리 굳건한 동맹이라 말하긴 어려운 상태였다. 결국 1943년 10월 13일에 연합국에 항복한 이탈리아 왕국이 독일에 선전을 포고하면서 동맹은 깨지고 말았다. 삼국동맹에는 독일의 괴뢰정권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이 대신 참가했지만 1944년에 들어서자 동구권 국가들이 차례로 동맹을 이탈했다. 1945년 4월 25일에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이 해체되고 5월 7일에 독일이 항복, 8월 15일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삼국동맹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분류:조약 분류:동맹 분류:삼상 분류: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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