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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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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태후는 어떤 면에선 중국 최초의 여황제라 할 수 있는 측천무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태후는 본래 부잣집 딸이었다. 그런데 유방의 관상을 보고 마음엔 든 그녀의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면서 원치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전혀 ‘황제’의 싹이 보이질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도 아니요, 남에게 다정다감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평생의 친구이자 신하였던 하후영의 얼굴에 장난치다가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서 곤혹을 치루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시정잡배 생활을 하던 그에게 여태후는 마음을 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후 벌어진 일들도 그랬다. 유방은 훗날 진나라에 대항해서 거병하면서,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덕분에 여태후는 아버지와 함께 항우에게 붙잡혀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항우는 유방을 격분시키기 위해, 솥을 걸어놓고 장인을 ‘삶아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유방은 오히려 웃으면서 ‘우리는 의형제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 삶고 나면 나중에 한 그릇 보내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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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태후는 어떤 면에선 중국 최초의 여황제라 할 수 있는 측천무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태후는 본래 부잣집 딸이었다. 그런데 유방의 관상을 보고 마음엔 든 그녀의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면서 원치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전혀 ‘황제’의 싹이 보이질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도 아니요, 남에게 다정다감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평생의 친구이자 신하였던 하후영의 얼굴에 장난치다가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서 곤혹을 치루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시정잡배 생활을 하던 그에게 여태후는 마음을 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후 벌어진 일들도 그랬다. 유방은 훗날 진나라에 대항해서 거병하면서,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덕분에 여태후는 아버지와 함께 항우에게 붙잡혀 오랫동안 포로생활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항우는 유방을 격분시키기 위해, 솥을 걸어놓고 장인을 ‘삶아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유방은 오히려 웃으면서 ‘우리는 의형제를 맺었으니,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 삶고 나면 나중에 한 그릇 보내라’라고 했다. 이는 유방의 심리전이었다. 유방은 항우가 귀족출신으로, 체면과 겉치례를 중시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따라서 그의 그런 면을 자극시키고, 자신은 여태후를 비롯한 가족을 삶아죽여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드러냈다. 항우는 이가 부득부득 갈렸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결국 솥을 치우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유방의 가족을 괜찮게 대접한 것으로 나올 지경이다- 여태후의 희망은 자식뿐이었다. 그녀와 유방 사이에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바로 세자 유영과 노원 공주였다. 그런데 훗날 여태후는 하후영을 통해 팽성 전투에서 패한 유방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유영과 노원 공주를 무려 세 번이나 수레에서 던져버린 일을 듣게 된다. 오직 자식들만 바라보며 낙을 삼아온 그녀가 받았을 충격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유영이 황제가 된후, 척부인을 잔인하게 처리하는 데는 이러한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쯤에서 그녀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척부인을 이야기해보자. 척부인은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귀상을 타고 났다고 한다. 허리꺾기 춤이 일품이었다는 척부인은 워낙 절세미인인 탓에 유방이 첫눈에 반하고 만다. 이후, 천하통일한 유방은 자신의 대권을 척부인의 소생들에게 넘겨주려는 의도를 노골화했다. 그때마다 숙손통을 비롯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접어야 했지만, 이것은 여태후의 마음을 더더욱 자극했다. 상상해보라!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하고 오니, 웬 젊고 이쁜 여자가 자신의 남편을 사로잡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소생들을 차기황제에 올리려는 모종의 상황들이 계속해서 눈에 포착된다. 지난날에 대한 보상 심리와 여자로서의 질투심과 자식에 대한 사랑들이 합쳐져 그녀는 ‘독한 여태후’로 거듭날 수 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여태후는 유방을 충동질해서 한신과 영포를 죽였다. 여태후는 원래 장량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워낙 뛰어난 지혜를 지닌 장량은 자신이 정계에 있을 경우, 첫 번째 제거대상이 될 거라 보고 낙향해서 야인으로 지냈다. 반면, 한신은 철이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된 유방이 천재적인 군사가인 자신을 두려워한 나머지 제거하려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왕에서 후로 강등된 이후 ‘번쾌와 동급이네’라는 푸념을 공개적으로 했고, 그의 반란을 두려워한 여태후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원래 유방은 한신을 역모혐의로 체포했다가 인정상 죽이질 못했다. 그러나 여태후가 다시금 잡아들여 죽이고 말았다. 훗날 여태후가 유방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웃으면서 애처로워했다’는 사마천의 표현은 지극히 절묘하다고 하겠다. 팽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래 잡았던 팽월을 유방이 놓아주자, 여태후는 우연히 만난 팽월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알았다’라며 데려온 후, 오히려 유방을 충동질해서 죽이고 만다. 한신과 팽월이 죽자, 다음은 자신의 차례라 직감한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유방은 태자 유영을 보내 진압시키려 했다. 물론 여기엔 정치적인 계산도 어느정도 깔려있었다. 한나라 건국 이후, 거듭되는 반란토벌에 유방은 지칠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또한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의를 태자로 올리고 싶어하는 마음도 아직 남아있었다. 비록 한신과 팽월이 사라졌지만, 영포는 항우를 상대로 전과를 올린 역전의 용사였다. 따라서 당시 한나라측에선 유방이 직접 출정하지 않고는 상대할 자가 없었다. -영포측도 유방이 지쳐 나오지 않을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유방의 마음을 눈치챈 여태후는 강하게 반대했고, 조정신료들 역시 반대해 결국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고, 그 과정에서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된다. 놀란 사람들은 즉시 유방의 상처를 의원에게 보이길 원했으나, 유방은 ‘됐다’라며 만류했다. 아마 편치 않는 황제생활과 거듭된 전투에 신물이 난 것일지도... 어찌되었든 그 상처로 인해 유방은 세상을 떠나고, 여태후의 아들인 유영이 순조롭게 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러자 여태후는 즉각 척부인과 그녀의 소생인 유여의를 제거하려 했으나, 황제 유영은 ‘아버지의 유지’다며 그들을 감싸고 돌았다. 안타까운 것은 유영의 성격은 너무 부드러워서, 어머니인 여태후에게 당당히 맞서지 못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숙식을 하는 것으로 여태후가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황제가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는 법. 사냥으로 인해 궁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태후는 유여의를 죽이고, 척부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얼굴을 흉측하게 만든 다음, 화장실에 넣어버렸다. 훗날 화장실에서 본 이상한 생물이 척부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 유영은 어머니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치고는, 정치마저 관심을 거두고 향락에만 빠져 살게 된다. 그러자 여태후는 정권을 장악하고 모든 자리에 여씨를 앉혀서 ‘여씨세상’을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당시 조정에 있던 소하와 진평들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원래 서생이란 인물들은 자신의 ‘보존’에만 지극히 관심이 있는 자들이다. 한신-팽월-영포등의 제거과정을 보면서 그들은 몹시 불안에 떨었고, 실제로 유방이 죽은 이후 반란의 조짐까지 보였었다. 그러나 당시 여태후의 심복인 심이기와 조정대신의 대표인 역상이 만나 대타협을 이루어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그 이후 대대적인 정치적인 숙청은 이어졌다. 척부인의 소생말고도 다른 유씨들이 많았다. 여태후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별다른 이유없이 모두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유방의 여덟 형제중에 유여의, 조왕 유우, 조왕 유회, 연왕 유건이 그렇게 당했다. 여태후는 권력의 칼을 휘둘러 많은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결코 일반 백성들을 못살게 굴진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선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벌어지고 있어도, 백성의 동요가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조정대신들이 몸을 사린데는 이제 막 안정을 찾은 천하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어느 정도 있었다. 또한 8년 동안 정권을 틀어쥔 여태후의 통치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제국의 창업부터 유방의 곁에서 업무를 보았기 때문에 이해가 빨랐고,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윤택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당시 여존남비사상과 궁형(생식기를 잘리는 형벌)을 당한 나머지 사마천이 여성혐오증으로 인해 너무 잔인하게 붓을 놀린 것을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도 사마천은 그녀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잘 했음을 분명히 지적하곤 있다. 여태후의 ‘여씨천하’는 10년을 채우지 못했다. 우선 조정대신들의 불만이 컸다. 그들은 일찍이 고조 유방과 삽혈을 하며 ‘제후왕이라도 유씨를 세우자’라는 맹세를 했다. 따라서 한때 권력의 차이로 여씨들에게 천하를 내주었지만, 유씨들에게 권력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장 같은 인물은 서슬퍼런 여태후의 눈앞에서 경전가를 부르며 대들정도로 패기가 넘쳤다. -그가 <경전가>를 부른 이유는 ‘종자가 다른 것이 나오걸랑 파버려라’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당시 유씨가 아닌 여씨들이 제후가 되고 정권을 차지한 것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었다!-심지어 그는 당시 연회장에서 눈치를 보다가 나가려고 하던 여씨 한명을 서슬퍼런 군율로 처리했다. 게다가 여태후의 수명도 마침 다해서, 그 일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주발장군과 손을 잡고 있던 승상 진평은 그녀가 떠나자마자 다시 여씨들을 내쫓고, 유씨들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측천무후도 그랬지만, 여태후 역시 분명 시대의 인걸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시대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당시 시대는 남성이 황제가 되는 것은 인정해도 여성이 황제가 되거나, 앞에 나서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몹시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런 시대적 환경에서 그녀들이 칼을 휘둘러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각자 능력 있는 신하를 기용하고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한 공로는 분명히 인정해줘야 한다. -특히 측천무후의 경우엔 무려 60년동안 정권을 휘둘렀다. 그녀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다- 분류:초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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