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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국 공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이다. 보탑실리 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원(元)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 어머니가 고려인이라 왕이 될 기회를 놓쳤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적극 찬성 했다고 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한 1351년에 공민왕에게 시잡을 왔으며 그해 10월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공민왕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노국대장공주는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갈 때 원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에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이다. 원 순종의 손자인 위왕 베이르 테무르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이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이다.
- 노국 공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이다. 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원(元)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 어머니가 고려인이라 왕이 될 기회를 놓쳤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적극 찬성 했다고 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한 1351년에 공민왕에게 시잡을 왔으며 그해 10월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공민왕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1365년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정신적 아나키 상태에 빠졌고, 공주가 죽자 왕이 태후를 받들어 덕녕공주전에 거처를 옮기고 3일 간 조회를 그쳤으며 백관은 현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왕은 불교에 혹하여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시중 유탁이 옳지 않다 반대하여 그만 두었다. 그녀가 죽은 뒤부터 왕은 상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불사(佛事)를 일으켜 혼제(魂祭)를 지내고 화려한 영전(靈殿)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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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국 공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이다. 보탑실리 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원(元)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 어머니가 고려인이라 왕이 될 기회를 놓쳤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적극 찬성 했다고 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한 1351년에 공민왕에게 시잡을 왔으며 그해 10월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공민왕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노국대장공주는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갈 때 원으로부터 승의공주(承懿公主)에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이다. 원 순종의 손자인 위왕 베이르 테무르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이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이다.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이 태어난 고국을 배척하고, 남편을 도와 공민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1365년(공민왕 14)에 노국대장공주는 겨우 아이를 갖게 되었으나, 난산으로 죽었다. 그녀가 죽자 공민왕은 매우 슬퍼했다. 1365년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정신적 아나키 상태에 빠졌고, 공주가 죽자 왕이 태후를 받들어 덕녕공주전에 거처를 옮기고 3일 간 조회를 그쳤으며 백관은 현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왕은 불교에 혹하여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시중 유탁이 옳지 않다 반대하여 그만 두었다. 그녀가 죽은 뒤부터 왕은 상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불사(佛事)를 일으켜 혼제(魂祭)를 지내고 화려한 영전(靈殿)을 지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지 얼마 후 정치권을 신돈에게 양도했다. 공민왕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음으로써 성격 이상을 일으킨다. 또한 공민왕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혼제를 지냈으며, 그 진영을 모시기 위해 호화로운 영전을 짓도록 하였다. 노국 공주가 사망후 공민왕은 그 충격으로 자제위를 설치 전국각지에서 미소년을 끌어다 모았다. 툴루이의 장녀 노국대장공주 야속불화(魯國大長公主 也速不花)는 생모미상(生母未詳)이며 홍길랄 알진(弘吉剌 斡陳)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차녀 : 독목간 공주(獨木干 公主) - 생모미상(生母未詳), 홍길랄 섭고태(弘吉剌 聶古台)에게 하가(下嫁) 3녀 : 조국공주 설불한(趙國公主 薛不罕) - 생모미상(生母未詳), 홍길랄 섭고태(弘吉剌 聶古台)에게 하가(下嫁) 분류:옹고집전 분류:원나라 사람 분류:고려 사람 분류:공주 분류:공민왕 분류:난산 분류:정도전 분류:신의 분류:노양 분류:노국 분류:불화 분류:야속 분류:대장 공주
- 노국 공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이다. 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원(元)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 어머니가 고려인이라 왕이 될 기회를 놓쳤던 공민왕은 노국공주와의 결혼을 적극 찬성 했다고 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한 1351년에 공민왕에게 시잡을 왔으며 그해 10월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공민왕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1365년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정신적 아나키 상태에 빠졌고, 공주가 죽자 왕이 태후를 받들어 덕녕공주전에 거처를 옮기고 3일 간 조회를 그쳤으며 백관은 현관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 왕은 불교에 혹하여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시중 유탁이 옳지 않다 반대하여 그만 두었다. 그녀가 죽은 뒤부터 왕은 상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불사(佛事)를 일으켜 혼제(魂祭)를 지내고 화려한 영전(靈殿)을 지었다. 공민왕은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음으로써 성격 이상을 일으킨다. 노국 공주가 사망후 공민왕은 그 충격으로 자제위를 설치 전국각지에서 미소년을 끌어다 모았다. 분류:옹고집전 분류:원나라 사람 분류:고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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