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산성(葛山城)은 신라의 산성이다. 삼국사기 소지왕 11년(489) 기록에서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의 이 과현은 영주시 상망동에서 지누로 너머가는 고개로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인 이 과현을 너머왔다는 이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 내이군(奈已郡)이 었던 영주는 신라의 강역이 었지만 소백산 밑의 급벌산군(伐山郡)이라 불리던 순흥 지방은 백제의 강역이 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순흥지방에 고구려 군이 들어온 것은 장수왕 69년(481)이며 이곳에서 신라와 맞서서 8년을 기다린다. 이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던 양 지점에는 상당 수의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은풍(殷豊)의 상을곡성(上乙谷城), 풍기의 토성(土城), 마군령 밑의 임곡성(林谷城) 등은 고구려군의 성이며 신라 측 성으로서는 고현성(古峴城 성재), 갈산성(葛山城), 용산성, 과현, 내성인 구성(龜城)이 있다. 큰 산 소백산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신라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한 신라의 영주 땅에 입성한 고구려는 1개월만에 신라의 북변 많은 고을을 점령했다.
갈산성(葛山城)은 신라의 산성이다. 삼국사기 소지왕 11년(489) 기록에서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을 함락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의 이 과현은 영주시 상망동에서 지누로 너머가는 고개로서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인 이 과현을 너머왔다는 이 기록으로 보아서 당시 내이군(奈已郡)이 었던 영주는 신라의 강역이 었지만 소백산 밑의 급벌산군(伐山郡)이라 불리던 순흥 지방은 백제의 강역이 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순흥지방에 고구려 군이 들어온 것은 장수왕 69년(481)이며 이곳에서 신라와 맞서서 8년을 기다린다. 이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하고 있던 양 지점에는 상당 수의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은풍(殷豊)의 상을곡성(上乙谷城), 풍기의 토성(土城), 마군령 밑의 임곡성(林谷城) 등은 고구려군의 성이며 신라 측 성으로서는 고현성(古峴城 성재), 갈산성(葛山城), 용산성, 과현, 내성인 구성(龜城)이 있다. 이 과현 밑의 마을 이름을 예나 지금이나 망동(望洞)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을 보는 동리라는 뜻이며 서쪽 마을 이름을 술골(戌谷 숙골) 곧 군사들의 주둔지라는 뜻이다. 신라는 영주까지는 손에 넣었지만 소백산까지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큰 산 소백산을 관리할 만한 능력이 신라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약한 신라의 영주 땅에 입성한 고구려는 1개월만에 신라의 북변 많은 고을을 점령했다. 문경·예천·봉화·예안·영양·청송까지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동해안을 따라 남하한 고구려 군사들은 울진(蔚珍)·평해(平海)·영덕(盈德)까지, 영서(嶺西) 백제 땅을 따라 내러온 고구려군은 괴산(槐山)과 진천(鎭川)과 직산(稷山)을 점령하고 아산만(牙山灣)까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