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가 되면 평양부성, 혹은 평양읍성을 가리키는 것은 내성(內城)입니다. 고구려와 고려는 평양에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분류되었지만 조선시대 초기에는 중성과 내성을 합쳐서 내성이라고 칭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34년에는 외성(外城)에도 민가가 조밀하다는 내용을 인용해서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1525년에 홍수가 났을 때에 내성(內城)의 민가가 128채, 외성(外城)의 민가가 65채가 침몰되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성(外城)에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였을 것입니다. 평양은 조위총의 난부터 시작해서 몽골과의 전쟁 등을 겪으면서 그 이전에 비해서 쇠락한 모습을 보이며, 실제 기록에서도 외성(外城)에는 빈터가 많은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쌓았던 외성(外城)이 시대가 흐르면서 무너지자 조선 초기에 전쟁, 혹은 홍수로 인한 이유때문에 다시 쌓으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민가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전체가 아닌 일부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옳겠죠. 평양 읍성의 칠성문 누각에는 용두와 취두가 보이지 않습니다. 분류:평양의 산성 분류:읍성 분류:평산성 분류:양산성
조선시대 후기가 되면 평양부성, 혹은 평양읍성을 가리키는 것은 내성(內城)입니다. 고구려와 고려는 평양에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분류되었지만 조선시대 초기에는 중성과 내성을 합쳐서 내성이라고 칭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34년에는 외성(外城)에도 민가가 조밀하다는 내용을 인용해서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1525년에 홍수가 났을 때에 내성(內城)의 민가가 128채, 외성(外城)의 민가가 65채가 침몰되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성(外城)에 시가지가 형성된 것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였을 것입니다. 평양은 조위총의 난부터 시작해서 몽골과의 전쟁 등을 겪으면서 그 이전에 비해서 쇠락한 모습을 보이며, 실제 기록에서도 외성(外城)에는 빈터가 많은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쌓았던 외성(外城)이 시대가 흐르면서 무너지자 조선 초기에 전쟁, 혹은 홍수로 인한 이유때문에 다시 쌓으려는 시도가 계속되는 것으로 보아서 실제 민가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전체가 아닌 일부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옳겠죠. 평양 읍성의 칠성문 누각에는 용두와 취두가 보이지 않습니다. 분류:평양의 산성 분류:읍성 분류:평산성 분류:양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