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은 한나라 광무제가 세운 후한의 수도였다.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다시 일어난 한나라 동한 서기 25년, 황족(皇族)의 먼 지류인 유수(劉秀 - 한 광무제)는 새롭게 한나라를 재건하고 수도를 낙양에 건립하니 역사상 이를 ‘동한(東漢)’ 혹은 후한이라 한다. 광무제는 차례로 주변 약소 국가를 차례로 병합한다. 후한은 국가적 안정을 바탕으로 천축국의 승려가 한나라 낙양을 방문 하면서 중국에 처음 불교가 전파된다. 일본에서도 한(漢)에 우호 사절단을 보내어 광무제로부터 왕 칭호를 받는다. 당나라때 장안-낙양 차이 750리는 한나라 때 907리가 된다. 이는 당나라 때 십리가 4km이고 후한시대 십리가 3km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 시대를 기준으로 교정하면 임둔은 낙양에서 5230리, 낙랑에서 230리가 된다. 모본왕이 일찌기 한나라 수도 낙양과 그리 멀지도 않은 태원까지 점령했다가 한나라가 요동 태수 채동을 시켜서 막대한 공물을 바쳐서 돌려준 일이 있었다.
낙양은 한나라 광무제가 세운 후한의 수도였다.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다시 일어난 한나라 동한 서기 25년, 황족(皇族)의 먼 지류인 유수(劉秀 - 한 광무제)는 새롭게 한나라를 재건하고 수도를 낙양에 건립하니 역사상 이를 ‘동한(東漢)’ 혹은 후한이라 한다. 광무제는 차례로 주변 약소 국가를 차례로 병합한다. 후한은 국가적 안정을 바탕으로 천축국의 승려가 한나라 낙양을 방문 하면서 중국에 처음 불교가 전파된다. 일본에서도 한(漢)에 우호 사절단을 보내어 광무제로부터 왕 칭호를 받는다. 당나라때 장안-낙양 차이 750리는 한나라 때 907리가 된다. 이는 당나라 때 십리가 4km이고 후한시대 십리가 3km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한 시대를 기준으로 교정하면 임둔은 낙양에서 5230리, 낙랑에서 230리가 된다. 모본왕이 일찌기 한나라 수도 낙양과 그리 멀지도 않은 태원까지 점령했다가 한나라가 요동 태수 채동을 시켜서 막대한 공물을 바쳐서 돌려준 일이 있었다. 한은 황건군의 봉기 이후, 꼭두각시 정권으로 변한다. 조조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220년, 조조가 위나라를 세우자, 다음 해에 유비도 한나라 제왕이라 칭함고 동시에 승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