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2세 [Otto II,Otto von Nordheim 이라고도 함. ?~ 1083. 1. 11]은 바이에른 공작이며 작센의 주요 귀족이다. 독일 왕 하인리히 4세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다. 오토 1세는 로마는 물론 남부의 비잔티움 제국 영역까지 진출했고, 비잔티움 제국과 협상하여 972년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비잔티움의 공주를 결혼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롱기누스의 창은 오토 2세에서 오토 3세로 전해졌고,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헨리 2세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때는 981년, 오토 2세는 사라센과 전쟁을 치렀다. 1061년 오토는 어린 하인리히 4세의 모후이자 섭정인 푸아투의 아녜스에 의해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오토는 대주교인 쾰른의 아노(Anno)가 하인리히 4세를 유괴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일로 아녜스는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하인리히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오토는 독일 국가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작센의 다른 귀족들과 함께 오토는 하인리히가 미성년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린 왕의 영지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분류:신성 로마 제국 분류:오토
오토 2세 [Otto II,Otto von Nordheim 이라고도 함. ?~ 1083. 1. 11]은 바이에른 공작이며 작센의 주요 귀족이다. 독일 왕 하인리히 4세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다. 오토 1세는 로마는 물론 남부의 비잔티움 제국 영역까지 진출했고, 비잔티움 제국과 협상하여 972년 자신의 아들 오토 2세와 비잔티움의 공주를 결혼시켰다. 일설에 의하면 롱기누스의 창은 오토 2세에서 오토 3세로 전해졌고,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헨리 2세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때는 981년, 오토 2세는 사라센과 전쟁을 치렀다. 1061년 오토는 어린 하인리히 4세의 모후이자 섭정인 푸아투의 아녜스에 의해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오토는 대주교인 쾰른의 아노(Anno)가 하인리히 4세를 유괴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일로 아녜스는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하인리히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오토는 독일 국가의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작센의 다른 귀족들과 함께 오토는 하인리히가 미성년이라는 점을 이용해 어린 왕의 영지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070년 오토는 하인리히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고발되었고 바이에른과 작센에 있는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는 1071년 투옥되었으나 다음해 작센에 있는 영지를 되찾았다. 1073년 작센에서 하인리히 4세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오토는 이 봉기를 지휘했다. 비록 바로 파기되고 말았지만 게르슈퉁겐 평화조약(1074)은 바이에른에 있는 오토의 영지가 회복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1075년 6월 하인리히가 전쟁을 재개했을 때 오토는 다시 포로가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하인리히는 오토를 사면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작센의 고위 관직을 주었다. 1076년 주교 임명권 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퇴위시킨 후, 오토는 작센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바이에른의 자기 영지가 회복되자마자 그는 1077년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하인리히에 대립한 독일 왕으로 뽑는 데 동의했다. 노련한 장군이었던 오토는 1078년과 1080년 1월 하인리히 군대에게 패배를 안겼고 1080년 10월에는 엘스터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하인리히의 반대 세력은 잘름의 헤르만을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오토가 죽자 헤르만의 군사 지지 세력은 붕괴했다. 분류:신성 로마 제국 분류:오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