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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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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읍성은 제주의 정치, 행정의 중심부 였던 제주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언제 쌓아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옛 탐라국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오형단 남쪽에 성터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제주읍성은 과거 제주시의 중심지였다. 1928년 산지항 축조 공사의 자재로 성벽의 돌들이 쓰이다 보니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제주시 남문 로터리 동쪽에 복원된 성벽과 과거의 성벽이 도로 하나를 두고 연이어져 있어 찾아가 볼 만 하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본다면 걸어갈 정도의 거리이다. 이 때 동쪽으로 성을 확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식수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산지천 안쪽으로 성을 쌓다보니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동쪽에 겹성을 쌓아 가락천 물을 끌어들인 정도였다. 하지만 곽흘 목사 때 성을 확장함으로써 산지천의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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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읍성은 제주의 정치, 행정의 중심부 였던 제주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언제 쌓아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옛 탐라국 때부터 있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오형단 남쪽에 성터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제주읍성은 과거 제주시의 중심지였다. 1928년 산지항 축조 공사의 자재로 성벽의 돌들이 쓰이다 보니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제주시 남문 로터리 동쪽에 복원된 성벽과 과거의 성벽이 도로 하나를 두고 연이어져 있어 찾아가 볼 만 하다. 중앙로를 중심으로 본다면 걸어갈 정도의 거리이다. 제주시 관덕정 일대는 과거 탐라국 시대에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제주행정의 중심지였다. 그런 만큼 그 곳에 행정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갖는 읍성이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제주읍성이 실제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치 않다. 보편적으로는 중국 {수서(隋書)}에 나오는 '담모라국(聃牟羅國)에 성(城)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삼아 탐라국 시대부터 제주시 일원에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일부에서는 {당회요(唐會要)}의 '탐라에는 성황(城隍)이 없다'라는 기록을 근거 삼아 탐라국 시대에는 제주읍성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앞의 {수서}에 나오는 '담모라국'을 탐라국과는 다른 지역으로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분명 이 곳에 성이 있었던 것 같다. 삼별초 별장 이문경이 제주성에 도착했을 때 성주 고인단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는 기록이나, 조선 태종 때 '제주성을 수리했다'라는 기록 등은 고려 때 이미 이 곳에 성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초기의 제주읍성은 지금의 병문천(현재 복개되어 있음)과 산지천을 자연 해자로 삼아 그 안쪽으로 쌓여져 있었다. 그런데 1555년(명종 10년) 1천여명의 왜구가 들이닥쳤던 을묘왜변을 계기로 성은 더욱 확장되었다. 을묘왜변 당시 산지천 넘어 동쪽 언덕에 진을 친 왜구들이 성안을 훤히 들여다보며 공격해왔기 때문에 당시의 성 구조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자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1565년(명종 20년)에 새로 부임한 곽흘(郭屹)목사는 동쪽으로 더욱 확장하여 동쪽 높은 언덕을 성안으로 끌어 담았다. 현재의 동문파출소에서 기상대로 이어지는 선이 그 경계가 된다. 이 때 동쪽으로 성을 확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식수 확보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산지천 안쪽으로 성을 쌓다보니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동쪽에 겹성을 쌓아 가락천 물을 끌어들인 정도였다. 하지만 곽흘 목사 때 성을 확장함으로써 산지천의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성을 확장하게 되자 산지천 위로 성담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남쪽과 북쪽 2곳에 수구(水口)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수구 위에는 건물이 지어졌는데 남쪽의 것을 제이각, 북쪽 것을 죽서루라고 했다. 사람들은 남쪽의 제이각을 흔히 남수각이라고 불렀는데 그 때문에 현재까지 남수각이라는 지명이 남게 되었다. 한 때 남수각 일대는 큰비가 오면 범람해서 많은 피해를 입곤 했는데 최근 하천 정비 공사로 안전하게 되었다. 아쉬운 건 공사를 하면서 과거 모습 재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 남수구는 2개의 아름다운 무지개 다리로 되어 있었다. 이왕 공사를 하며 새롭게 다리를 놓을 양이라면 무지개 모양을 재현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후 1599년(선조 32년)에는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부임해 와 제주읍성을 다시 보완했는데 마침 공사기간이 겨울철이어서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성을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1704년 기록인 이형상의 {남환박물}에는 남수각 외에도 성 위의 여러 건물들을 소개되어 있는데 동문 위의 제중루, 남문 위의 정원루, 서문 위의 백호루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제주읍성은 제주대학병원 서쪽 카센터 근처와 남문로터리 동쪽 오현단 위 그리고 제주기상대 아래쪽에서만 일부를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일제가 1925년∼1928년 사이에 산지항 확장 공사를 하면서 읍성을 헐고 여기서 나온 돌로 바다를 매립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과거의 잔해가 잘 남아 있는 곳은 오현단 동쪽 산지천 접한 부분이다. 그 옆에는 현재 복원된 성도 있으니 비교하면서 볼 만 하다. 두 성벽을 비교해 볼 때 특히 안타까운 건 여장 시설을 전혀 살리지 않고 복원했다는 점이다. 분류:읍성 분류:제주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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