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1세 [Otto I,별칭은 오토 대제(Otto der Grosse). 912. 11. 23~ 973. 5. 7 튀링겐 멤레벤]는 작센 공(오토 2세 : 936~961) 및 독일의 왕(936~973)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962~973)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역사에서 하나의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한 오토 1세는 비전(vision)과 능력에서 분명 탁월한 군주였다. 기독교 문명을 지켜내는 데 일조하여 역사상 대제(大帝,Otto der Grosse)로 불리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을 제압하고 헝가리인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독일제국을 강화했다. 교회를 체제안정의 지원세력으로 활용해 공고한 제국을 건설하고 문예부흥을 촉진시켰다.
오토 1세 [Otto I,별칭은 오토 대제(Otto der Grosse). 912. 11. 23~ 973. 5. 7 튀링겐 멤레벤]는 작센 공(오토 2세 : 936~961) 및 독일의 왕(936~973)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962~973)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역사에서 하나의 유력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던 신성로마제국을 이룩한 오토 1세는 비전(vision)과 능력에서 분명 탁월한 군주였다. 기독교 문명을 지켜내는 데 일조하여 역사상 대제(大帝,Otto der Grosse)로 불리고 있다.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을 제압하고 헝가리인들에게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 독일제국을 강화했다. 교회를 체제안정의 지원세력으로 활용해 공고한 제국을 건설하고 문예부흥을 촉진시켰다. 장차 리우돌핑 왕조, 즉 작센 왕조의 왕인 하인리히 1세가 될 아버지와 그의 둘째 부인 마틸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초기생애에 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한때는 전투를 치르는 아버지를 따라다닌 것으로 보인다.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槍)을 지니고 있던 하인리히 1세(919~936)는 작센 왕가의 지배자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그의 아들 오토 대제(AD 955~963)에게 창을 물려주었다. 930년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Edward the Elder)의 딸 이디스(에디트)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혼지참금으로 번창하는 마크데부르크 성읍을 받았다. 하인리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그가 죽기 1개월 전인 936년 8월 7일 아헨에서 독일 공작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고 마인츠와 쾰른의 대주교들에 의해 왕관을 썼다. 하인리히 1세가 자기 수하의 공작들을 다루는 데 애를 먹은 반면 새 왕은 그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실하게 주장했다. 그때문에 바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특히 프랑켄의 에버하르트와, 같은 이름인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를 상대로 벌어진 전쟁에서는 불만을 품은 작센의 귀족들이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의 지도 아래 상대편에 합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마르는 패배해 살해되었으며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왕에게 항복했고 바이에른의 에버하르트는 직위에서 쫓겨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939년에 오토의 동생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켜 프랑켄의 에버하르트 및 로렌의 지젤베르와 합세했으며 프랑스 왕 루이 4세의 지원을 받았다. 오토는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에버하르트는 전투중에 쓰러졌고 지젤베르는 달아나다가 익사했으며 하인리히는 형에게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1년에 하인리히는 다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이 음모는 이내 발각되었고 다른 가담자들은 처벌받았지만 하인리히는 또다시 용서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형에게 충성을 바쳤으며 947년에 바이에른 공작작위를 받았다. 다른 독일 공작작위도 비슷하게 오토의 친척들에게 증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