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숙(徐恩淑, 1900년 12월 19일 ~ 1977년 7월 2일)은 한국의 교육인이다. 초명은 '서정순(徐貞順)'이다. 인천 출신이다. 선교사가 세운 영화여학교에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신교육을 받았다. 이후 서울로 유학해 이화학당의 고등과와 대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인천 출신의 학교 선배인 김활란과는 이때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어 평생 정치적인 행보를 함께 했다. 대학 졸업후 모교 등지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유아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전의 부속 유치원인 이화보육학교의 학감을 지내며 한국 유아교육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화여전 회계과장, 사무국장, 학생처장 등을 거쳐, 1965년 이화여대 제8대 총장서리를 지냈다. 1970년 김활란 사후에는 재단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이어 맡았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전쟁협력 부문에 선정되었다.
서은숙(徐恩淑, 1900년 12월 19일 ~ 1977년 7월 2일)은 한국의 교육인이다. 초명은 '서정순(徐貞順)'이다. 인천 출신이다. 선교사가 세운 영화여학교에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신교육을 받았다. 이후 서울로 유학해 이화학당의 고등과와 대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인천 출신의 학교 선배인 김활란과는 이때부터 절친한 사이가 되어 평생 정치적인 행보를 함께 했다. 대학 졸업후 모교 등지에서 교사로 일하던 중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유아교육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전의 부속 유치원인 이화보육학교의 학감을 지내며 한국 유아교육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화여전 회계과장, 사무국장, 학생처장 등을 거쳐, 1965년 이화여대 제8대 총장서리를 지냈다. 1970년 김활란 사후에는 재단법인 이화학당 이사장직을 이어 맡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이 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조직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에 가담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 결성된 친일 여류 모임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지도위원을 맡았다. 그는 이때 배화여고 교장이었다. 1938년 《매일신보》에 전세체제를 맞은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大戰(대전)시 歐洲(구주) 부녀들의 苦行(고행)을 본떠 실천하자〉라는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전쟁협력 부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