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왕조 [Flavian dynasty]는 고대 로마의 황제 가문(69~96)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유대로 흥하고 또 한편으로 유대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첫번째인 베스파시아누스가 무엇보다도 유대전쟁(66~73) 통에 군권을 장악한 밑천으로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콜로세움을 건축한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플라비우스 왕조에 이어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도래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기간중 주목할 만한 일로는 군대를 재편해 충성스럽고 전문적인 성격을 강화한 것과 원로원 성원을 확대해 행정관들에게 공복(公僕) 의식을 심어준 것, 세금을 인상하고 체계화시킨 것, 제국의 변경지방을 강화한 것(영토가 새로 늘어난 것은 거의 없음) 등이 있다. 티투스의 통치기간은 짧았지만 인기가 있었으며 뒤이어 도미티아누스는 전제정치를 펼쳤다. 그는 원로원 계급과 싸웠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축과 경기, 연희를 위해 세금을 매기고 징발을 실시했다. 막바지의 공포정치(89~96)는 그의 암살로 끝났다. 플라비우스 왕조에 이어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도래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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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왕조 [Flavian dynasty]는 고대 로마의 황제 가문(69~96)이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경우는 어떻게 보면 유대로 흥하고 또 한편으로 유대로 인해서 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첫번째인 베스파시아누스가 무엇보다도 유대전쟁(66~73) 통에 군권을 장악한 밑천으로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콜로세움을 건축한 플라비우스 왕조는 30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플라비우스 왕조에 이어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도래했다. 플라비아 씨족에 속하는 베스파시아누스(69~79 재위)와 그의 아들인 티투스(79~81)·도미티아누스(81~96)가 그 구성원이다. 네로가 몰락하고(68)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대가 끊어지자 황제 자리를 놓고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원수정치가 갖는 군사적 기반과 황제와 로마를 연결해주는 유대관계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뒤이은 황제들인 갈바·오토·비텔리우스·베스파시아누스는 각기 스페인 군단과 황실근위대, 라인 강 주둔군, 도나우 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둔군 연합을 대표했다. 그리고 오토를 제외하고 전부 로마에 입성할 당시에 이미 사실상의 황제였다. 이 투쟁에서 최후의 생존자로 남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상대적으로 비천한 혈통 출신이었다. 원수정치가 더이상 혈통의 고귀함으로 위신을 누리지 못하게 되자 그 직책의 파행성을 가급적 없애고 합법적·영구적인 형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결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때 쓰던 황제의 개인 명칭 대신에 고심해서 만든 공식 칭호가 도입되었다. 또한 원수정치의 고유한 절대권력(예를 들면 검열권)을 내세우는 경향이 갈수록 커졌다. 자기 후손에게 지위를 물려주거나 양자를 들이는 방식을 통해 황제 지위에 세습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또한 '디비'(Divi), 즉 신격화된 카이사르들을 숭배하는 풍습이 황제위의 연속성과 정통성의 상징으로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기간중 주목할 만한 일로는 군대를 재편해 충성스럽고 전문적인 성격을 강화한 것과 원로원 성원을 확대해 행정관들에게 공복(公僕) 의식을 심어준 것, 세금을 인상하고 체계화시킨 것, 제국의 변경지방을 강화한 것(영토가 새로 늘어난 것은 거의 없음) 등이 있다. 티투스의 통치기간은 짧았지만 인기가 있었으며 뒤이어 도미티아누스는 전제정치를 펼쳤다. 그는 원로원 계급과 싸웠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건축과 경기, 연희를 위해 세금을 매기고 징발을 실시했다. 막바지의 공포정치(89~96)는 그의 암살로 끝났다. 플라비우스 왕조에 이어 오현제(五賢帝) 시대가 도래했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인데요, 플라비우스 왕조 때부터 건축에 들어가 이런 이름이 지어진 것 같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짧은 혼란기 이후에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69년부터 79년까지 통치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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