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 - 금오 산성은 고려 후기 경상북도 구미 지역 금오산에 축조한 이중의 석축 산성이다. 금오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가 문헌상에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빈번히 쳐들어와 인명을 살상하고 노략질을 일삼자, 인근 선산·인동·개령·성주 백성들이 금오산(金烏山)에 피난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고 군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곳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두었던 군창까지 두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수축(修築)이 이루어졌는데, 『태종실록(太宗實錄)』에 1410년(태종 10)에 수축했다고 기록된 것이 있고,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선산부조(善山府條)에 1413년(태종 13)에 수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180여 년간 문헌상 기록이 없어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4년 뒤인 1595년(선조 28) 금오 산성과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어야 할 것을 청하였고, 11월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비변사에서 “산성에 들어가 지키게 하되 금오·천생·부산성(富山)·악견 산성(岳堅)·공산 산성(公山)·용기 산성(龍起山城)을 먼저 지킬 것이고, 화왕 산성(火旺山城)을 급히 보수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선조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각 도 감사(監司)에게 이 뜻을 알리고 산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일선지(一善志)』 금오 산성조에 보면 단기간에 산성을 개수하는 데 9개 주현(州縣)의 민과 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97년(선조 30) 7월 왜군이 재침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으나, 1595년(선조 28)과 1596년(선조 29) 두 해에 걸쳐 각 산성을 수축하여 방책(防柵)을 튼튼히 하고 병력을 강화하여 왜군도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7년 동안 후반 4년 동안 금오산성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 후 41년 뒤인 1639년(인조 17) 외성을 쌓는 확장 공사가 실시되어 이중의 산성이 되었고, 1868년(고종 5)에 새로 고쳐 쌓았다. 금오 산성은 금오산도립공원 내에 있다. 외성은 해발 약 350m에 위치하여 금오산 입구와 대혜폭포를 연결하는 케이블카 노선 중간 지점에 있으며, 내성은 해발 약 850m의 성안 분지를 둘러싼 능선에 있다. 금오 산성은 해발 976m의 험준한 금오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내성(內城)과 북쪽의 계곡을 두른 외성(外城)의 이중으로 된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금오산의 절벽과 급경사를 이룬 정상부와 북향의 교각능선(交脚稜線)을 이용하여 포곡식(包谷式)으로 구축되어 있다. 내성은 산의 윗부분에 둘레가 10리나 되도록 쌓았는데, 절벽이 험한 곳은 천연의 성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따로 쌓지 않았다. 외성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데 둘레가 5리나 되며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 정도 된다. 북쪽 외성에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식의 높은 기단이 구축되어 있다. 정상에서 동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길이 약 450m, 폭 8~18m 되는 돌출 성곽이 있고 북쪽 외성 끝부분에도 짧은 돌출 성곽이 있다. 규모는 외성이 길이 약 3,700m, 내성이 2,700m이며 성벽의 높이는 지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북문 근방은 약 3m, 험준한 절벽은 1m 정도이다. 금오 산성 안에는 폭포가 있는 계곡과 연못, 우물이 많았고 각종 건물이 있었으나 모두 폐허가 되었다. 내성창(內城倉)·대혜창(大惠倉) 등의 창고와 진남사(鎭南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부근에는 도선암(道詵庵)·금오서원(金烏書院)·길재사(吉再祠) 등이 있었다. 지금은 내성과 외성의 문과 암문의 형체가 남아 있다. 샘인 금오정과 마지막으로 산성을 고쳐 쌓은 기록을 담고 있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가 남아 있다. 금오산성은 성벽이 붕괴된 곳도 있으나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호국의 국방 시설물로서 역사적으로 보존을 필요로 하는 관방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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