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1608. 7. 13 오스트리아 그라츠~ 1657. 4. 2 빈]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1637~57 재위)이다. 페르디난트3세는 108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태어나 1657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난 페르디난트 3세는 정력적이고 유능했으며 1626년부터 각료회의와 국사에 참여했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전황 속에 끌어가다가 1637년 황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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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3세 [Ferdinand III,1608. 7. 13 오스트리아 그라츠~ 1657. 4. 2 빈]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1637~57 재위)이다. 페르디난트3세는 108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태어나 1657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난 페르디난트 3세는 정력적이고 유능했으며 1626년부터 각료회의와 국사에 참여했다. 전쟁은 일진일퇴의 전황 속에 끌어가다가 1637년 황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16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30년전쟁 때 합스부르크 황궁에서 이른바 화평파를 이끌었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난 페르디난트는 정력적이고 유능했으며 1626년부터 각료회의와 국사에 참여했다. 오스트리아 대공(1621~)이었던 그는 1625년에는 헝가리 왕이, 1627년에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총사령관에 의해서 제국 군대 지휘를 거부당하자 발렌슈타인에 대한 음모에 가담했다. 1634년 발렌슈타인의 죽음은 페르디난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었다. 이후 그는 명목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 군대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634년 레겐스부르크를 함락시켰고 같은 해 뇌르틀링겐의 제1차 전투에서 스웨덴군에 승리했다. 오스트리아 궁정의 화평파 지도자로서 프라하 강화조약(1635. 5)을 가져온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강화조약을 통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의 중앙집권적·절대주의적인 계획을 은연중에 포기하고 1627년 당시의 현상태로 돌아갔다. 1636년 로마인들의 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상속자)으로 선출된 페르디난트는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비록 자기 영토 내에서 종교적 관용을 거부했고 재산을 박탈당한 프로테스탄트 귀족에 대해 원상회복 조치를 강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세력과 타협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 동의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유럽의 한복판에서 30년간 계속된 종교적 갈등을 끝냈으며 헝가리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많은 자유를 인정했다. 그는 대내적으로 상비군 창설과 황실회의 개혁을 통해 행정 능력을 입증해보였다. 그가 죽자 둘째 아들 레오폴트 1세가 재위를 계승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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