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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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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階伯?~660(의자왕 20)]은 백제의 장군으로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660년 나(羅)ㆍ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전사했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유배되어 있던 흥수(興首)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흥수는 신라군을 탄현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패한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군은 요충지를 잃고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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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 [階伯?~660(의자왕 20)]은 백제의 장군으로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을 방어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일찍이 사로(仕路)에 나가 벼슬이 달솔(達率:제2품)에 이르렀다. 660년 나(羅)ㆍ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전사했다 554년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한 뒤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641년 의자왕(義慈王)의 즉위 이래 백제는 고구려와 제휴하면서 신라를 자주 공격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라가 당나라와 협력하여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노리면서 상황은 크게 변했다. 더욱이 의자왕의 실정으로 국내가 혼란해지고,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정변 등 국내 문제로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으로 되자 백제의 위기는 점차 현실화되었다. 결국 660년(의자왕 20) 소정방(蘇定方)과 김유신(金庾信)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과 백강(白江)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왕은 유배되어 있던 흥수(興首)를 불러 대책을 물었다. 흥수는 신라군을 탄현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패한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군은 요충지를 잃고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