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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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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읍성은 상주시 낙양동의 읍성이다. 상주시 낙양, 무양, 남성, 서성 일대의 원형으로 쌓은 것으로 축성 연대나 누가 쌓은 지는 알 수 없다. 상산지에 의하면 석축 둘레는 1549척이고 높이는 9척이며 성내에는 21개의 샘과 1개의 연못이 있다고 기록하고 임진왜란 때 왜구가 이 성을 점거한 지 14개월이나 되며 성밖에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또 석성 밖에 서남쪽으로 토성을 쌓았다고 하여 낙양동을 토성이라 한다. 또 성내의 동리명을 남성, 서성, 성동으로 불리 우고 있다. 임란 때 정 기룡 장군이 갑장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남산으로 넘어 와 시문을 부수고 기습하여 동문으로 도망가는 적을 매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밤나무 숲에서 쳐부수었다고 한다. 상주읍성은 임진란 이후 폐허가 된 것을 1899년(고종 6년) 남 정학 목사에 의하여 일부가 수축되고 1871년 조 병노 목사가 계속 보수하였으나 그 후 상주시가지의 번창과 성의 무용으로 철폐를 면치 못하여 1912년 완전히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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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읍성은 상주시 낙양동의 읍성이다. 상주시 낙양, 무양, 남성, 서성 일대의 원형으로 쌓은 것으로 축성 연대나 누가 쌓은 지는 알 수 없다. 상산지에 의하면 석축 둘레는 1549척이고 높이는 9척이며 성내에는 21개의 샘과 1개의 연못이 있다고 기록하고 임진왜란 때 왜구가 이 성을 점거한 지 14개월이나 되며 성밖에 10척이 넘는 호를 파고 또 석성 밖에 서남쪽으로 토성을 쌓았다고 하여 낙양동을 토성이라 한다. 또 성내의 동리명을 남성, 서성, 성동으로 불리 우고 있다. 임란 때 정 기룡 장군이 갑장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남산으로 넘어 와 시문을 부수고 기습하여 동문으로 도망가는 적을 매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밤나무 숲에서 쳐부수었다고 한다. 상주읍성은 임진란 이후 폐허가 된 것을 1899년(고종 6년) 남 정학 목사에 의하여 일부가 수축되고 1871년 조 병노 목사가 계속 보수하였으나 그 후 상주시가지의 번창과 성의 무용으로 철폐를 면치 못하여 1912년 완전히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