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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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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 Khitan) 글단, 글안,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고(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이였다.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으로, 중국어 발음은 ‘키타이’(kitai)이다. 지금은 몽골족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없다. 거란이란 단철, 즉‘정제한 철’이라는 뜻으로 견고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후에 거란에 대항하던 여진족은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금金’이라 하였다. 몽고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된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사용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 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 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를 거쳤다.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는 926년 1월 15일, 거란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고 15대 임금인 애왕 대인선이 포로로 잡혀 결국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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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 Khitan) 글단, 글안,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고(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이였다.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으로, 중국어 발음은 ‘키타이’(kitai)이다. 지금은 몽골족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없다. 거란이란 단철, 즉‘정제한 철’이라는 뜻으로 견고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후에 거란에 대항하던 여진족은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금金’이라 하였다. 몽고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된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사용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 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 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를 거쳤다.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는 926년 1월 15일, 거란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고 15대 임금인 애왕 대인선이 포로로 잡혀 결국 멸망하였다 고려는 원래부터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거란은 서로 외교를 맺자고 낙타 50마리와 사신을 보냈는데, 왕건은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 50마리는 모두 굶겨 죽였다. 그리고 송나라와 손을 잡았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북진 정책을 펼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북방 민족들은 계속해서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親宋政策)과 정안국(定安國)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l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분류:거란 거란(契丹, Khitan) 글단, 글안, 거란족은 4세기 이래 동몽고(東蒙古)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민족이였다.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으로, 중국어 발음은 ‘키타이’(kitai)이다. 지금은 몽골족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없다. 거란이란 단철, 즉‘정제한 철’이라는 뜻으로 견고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후에 거란에 대항하던 여진족은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금金’이라 하였다. 몽고족과 퉁구스족의 혼혈족이라는 설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몽고계의 한 종족으로 추측된다. '거란'이라는 용어는 모용연(慕容燕)에 의해 사용되었다. 일찍이 고구려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거란은 고려와 비슷한 시기인 10세기 초에 일어난 북방 민족으로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거란은 우리나라 남북국시대의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세력 범위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송나라 및 고려와 상당 기간의 투쟁기를 거쳤다. 번영을 구가하던 발해는 926년 1월 15일, 거란의 전면적인 공격을 받아 수도인 홀한성이 함락되고 15대 임금인 애왕 대인선이 포로로 잡혀 결국 멸망하였다 고려는 원래부터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거란은 서로 외교를 맺자고 낙타 50마리와 사신을 보냈는데, 왕건은 사신을 유배시키고 낙타 50마리는 모두 굶겨 죽였다. 그리고 송나라와 손을 잡았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한 북진 정책을 펼였다. 이로 인해 고려와 북방 민족들은 계속해서 충돌을 하게 되었다.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親宋政策)과 정안국(定安國)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l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