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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金益相, 1895년 ~ 1925년 6월 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살해되었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金元鳳, 金若山)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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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金益相, 1895년 ~ 1925년 6월 6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살해되었다.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기독교계 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광성연초공사에서 일하던 중 1920년 펑톈(奉天)지점으로 전근갔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철혈단(鐵血團,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단장 김원봉(金元鳳, 金若山)으로부터 일본기관의 파괴, 요인 암살이 곧 조국독립의 첩경이라는 설명을 듣고,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1921년 9월 12일 건물수리공을 가장하여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비서실에 폭탄을 던진 후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3월 28일 중국 시찰차 들어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암살하고자 상하이 세관부두에서 오성륜(吳成崙)·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권총으로 사격하고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오성륜은 4월 1일 탈옥함).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호송되어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되어 출옥하였으나, 미행하던 일본형사에게 살해되었다(1925년 6월 6일).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