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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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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伍子胥, ? ~ 기원전 485년)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자서(子胥)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오나라를 섬기고, 오의 약진에 큰 공헌했다. 초(楚)나라의 대부를 지낸 오사(吳奢)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성이 건(乾)이고 이름이 황이였다. 오자서는 무용과 지략을 겸비하여 무용 에 있어서는 삼국지의 여포에 비견되고 지략에 있어서는 제갈공명에 비견되는 불세출의 명장이다. 초(楚)나라 평왕(平王)으로부터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하자 복수의 한을 가슴에 품고 초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부차의 인정을 받아 '도행역시'의 복수를 하였다. 오자서의 퇴장은 뜻밖에 빨리 찾아왔다. 기원전 484년, 부차는외교 교섭을 위해 오자서를 제나라에 파견했다. 오나라를 섬기고, 오의 약진에 큰 공헌했지만, 점점 오왕과 사이가 벌어져 끝내는 멍청한 부차의 강요로 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나라에 범려가 있었다면 오나라에는 오자서가 있다. 범려는 월을 부흥시켜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오의 오자서의 충언 을 오왕 부차가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죽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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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伍子胥, ? ~ 기원전 485년)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자서(子胥)는 자이고, 이름은 원(員)이다. 오나라를 섬기고, 오의 약진에 큰 공헌했다. 초(楚)나라의 대부를 지낸 오사(吳奢)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선조는 원래 성이 건(乾)이고 이름이 황이였다. 오자서는 무용과 지략을 겸비하여 무용 에 있어서는 삼국지의 여포에 비견되고 지략에 있어서는 제갈공명에 비견되는 불세출의 명장이다. 초(楚)나라 평왕(平王)으로부터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하자 복수의 한을 가슴에 품고 초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부차의 인정을 받아 '도행역시'의 복수를 하였다. 오자서의 퇴장은 뜻밖에 빨리 찾아왔다. 기원전 484년, 부차는외교 교섭을 위해 오자서를 제나라에 파견했다. 오나라를 섬기고, 오의 약진에 큰 공헌했지만, 점점 오왕과 사이가 벌어져 끝내는 멍청한 부차의 강요로 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나라에 범려가 있었다면 오나라에는 오자서가 있다. 범려는 월을 부흥시켜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오의 오자서의 충언 을 오왕 부차가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죽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염황(중국인의 전설적인 조상)의 자손들이 설떡을 즐겨 먹는 것은 기원전 514년 오나라의 오자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제나라와 연합하여 월나라를 대처해야 한다는 오자서의 충고를 듣지 않고 무리하게 제나라를 공격하여 결국 월나라에게 망하게 된 오나라는 성 안에 갇여 굶어 죽어가게 되었다. 그때 오자서의 오랜 부하가 오자서의 유언대로 성 밑을 깊이 파서 찹쌀가루를 쪄 만든 성돌로 기근을 이겨 내겨 하였다. 그 후부터 해마다 음력설이 되면 집집마다 찹쌀가루로 ‘성돌’을 만들어 오자서에게 제물로 올렸다고 한다. 이리하여 음력설이 올 때마다 제물을 만들다 보니 ‘설떡’이라고 부르고 또 설에 떡을 먹는 풍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고소성을 지나서 멱라수변 다다르니 오자서와 굴삼려는 위국충혼 깊은 뜻이 애애 호호 슬피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