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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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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 해미읍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방어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아 피해가 막심했던 곳으로, 대책 마련을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 사업이 시작되었고, 세종 3년(1421)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내며 폐허가 되었는데,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의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곳의 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옛 모습을 되찾았다. 또한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곳으로, 개화기에 충청도 각 고을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한 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천주교 박해, 그 비극적 현장을 온몸으로 말하는 호야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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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읍성은 조선시대의 읍성. 해미읍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방어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아 피해가 막심했던 곳으로, 대책 마련을 위해 조선 태종 17년(1417)에 축조 사업이 시작되었고, 세종 3년(1421)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내며 폐허가 되었는데, 1974년에 동문과 서문의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3곳의 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가 옛 모습을 되찾았다. 또한 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곳으로, 개화기에 충청도 각 고을에서 잡혀온 천주교도들이 고문과 죽임을 당한 현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천주교 박해, 그 비극적 현장을 온몸으로 말하는 호야나무” 해미읍성 안에는 300년 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라고 불린다. 이 호야나무는 1866년에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천주교 박해 사건 때 충청도 각 지에서 잡혀온 약 1천명의 신자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고 처형까지 당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동쪽으로 뻗은 나뭇가지에는 고문에 사용된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또한 호야나무를 비롯해 신자들이 수감되었던 감옥터, 처형의 장소로 쓰였던 개천 돌다리판과 진둠벙등이 해미읍성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어, 매년 수만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