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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하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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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b|right|300px|"토카리인 조공", "장검을 지닌 기사 " 토하리인은 타림 분지의 토하리어를 쓰던 주민으로 인도유럽어족 중 제일 동쪽에 위치하였다. 그들은 타림분지에 기원전 1800년경부터 살아왔을 수 있다. 서기 9세기 경 그들은 위구르족의 투르크(돌궐)인에 의해 동화되었다. 타림분지에서 발견된 미라에서 나온 증거와 중국의 기록이있는데 그들의 많은 이들이 금발 또는 홍모 그리고 색목을 지녔다. 이러한 특성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인도 유럽어족의 초기 이주의 일부였으며 중국 서부의 타림분지는 인도유럽어족의 동쪽 한계였다.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토하리인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월지와 동일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그디아나의 기록이나 서방 측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월지의 사건들과 토하리인의 사건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소그디아나로 밀려났다. 그곳에서 대월지를 이룬 토하리인은 이후 인도로 이주하여 쿠샨 왕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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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b|right|300px|"토카리인 조공", "장검을 지닌 기사 " 토하리인은 타림 분지의 토하리어를 쓰던 주민으로 인도유럽어족 중 제일 동쪽에 위치하였다. 그들은 타림분지에 기원전 1800년경부터 살아왔을 수 있다. 서기 9세기 경 그들은 위구르족의 투르크(돌궐)인에 의해 동화되었다. 타림분지에서 발견된 미라에서 나온 증거와 중국의 기록이있는데 그들의 많은 이들이 금발 또는 홍모 그리고 색목을 지녔다. 이러한 특성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인도 유럽어족의 초기 이주의 일부였으며 중국 서부의 타림분지는 인도유럽어족의 동쪽 한계였다.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토하리인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월지와 동일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소그디아나의 기록이나 서방 측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월지의 사건들과 토하리인의 사건들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흉노의 침입으로 인해 소그디아나로 밀려났다. 그곳에서 대월지를 이룬 토하리인은 이후 인도로 이주하여 쿠샨 왕조를 이룬다. 타림 분지의 미라(기원전 1800년)와 토하리 문헌과 프레스코화(AD800)이 같은 지정학적인 영역에서 발견되었고 모두 인도 유럽어족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 프레스코화의 얼굴들은 대개 중세의 무슬림의 우상파괴에 의해 훼손되었다. 미라와 프레스코화 모두 인도유럽어족인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프레스코화와 타림분지의 미라가 직접 연결되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