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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한 [景閑,1299(충렬왕 25)~ 전라도 고부1374(공민왕 23)]은 고려시대 고승이다. 선(禪)과 교(敎)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 몸이라는 선교일체를 주장했고, 나옹·보우 등과 함께 임제선(臨濟禪)의 맥을 이었으며, 선가문학이 살아 움직이는 의의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백운 화상(白雲和尙)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출가하여 40여 년 동안 일정한 스승없이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다니며 도를 닦으며 수행하다가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0여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지공(指空)에게 법을 묻고, 석옥(石屋)에게서 임제종(臨濟宗)의 선법을 전해받은 뒤 귀국하였다. 1353년 석옥은 임종하면서 그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서 제자 법안(法眼)에게 전할 것을 당부하였고, 법안은 이듬해에 고려로 와서 이를 전하였다. 1367년에는 보우(普愚)의 천거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1365년에는 나옹(懶翁)의 천거로 다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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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한 [景閑,1299(충렬왕 25)~ 전라도 고부1374(공민왕 23)]은 고려시대 고승이다. 선(禪)과 교(敎)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 몸이라는 선교일체를 주장했고, 나옹·보우 등과 함께 임제선(臨濟禪)의 맥을 이었으며, 선가문학이 살아 움직이는 의의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백운 화상(白雲和尙)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출가하여 40여 년 동안 일정한 스승없이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돌아다니며 도를 닦으며 수행하다가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10여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지공(指空)에게 법을 묻고, 석옥(石屋)에게서 임제종(臨濟宗)의 선법을 전해받은 뒤 귀국하였다. 1353년 석옥은 임종하면서 그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서 제자 법안(法眼)에게 전할 것을 당부하였고, 법안은 이듬해에 고려로 와서 이를 전하였다. 1367년에는 보우(普愚)의 천거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고, 1365년에는 나옹(懶翁)의 천거로 다시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8년에는 왕비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흥성사(興聖寺)의 주지가 되었다. 1369년에는 김포 포망산 고산암(孤山庵)에서 은거하였다가, 다시 나옹 의 추천으로 1370년 9월에 있었던 공부선(功夫選)의 시관직(試官職)을 맡았다. 그뒤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게(偈)를 남기고 입적했다. 선은 무심일도(無心一道)여야 하므로 마지막에는 화두(話頭)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선과 교는 이름만 다를 뿐 평등한 한몸이라는 선교일체(禪 敎一體)를 주장하여, 고려만 불교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불교관을 보였다. 또, 나옹·보우 등과 함께 임제선(臨濟禪)의 법맥을 이었으나 선풍(禪風)은 보우 와 다른 바가 있다. 같은 좇 제자이면서 보우는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였 고, 그는 오히려 간화선을 넘어선 구경지적(究竟地的)인 공부를 중요시하였으 며, 무심무념을 주창하였다. 화두(話頭)로써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조주(趙 州)의 '무(無)'·'만법귀일(萬法歸一)'· '부모미생전본래면목 (父母未生前本來 面目)'을 들도록 했고, 이 화두를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장 오묘한 하나의 방편은 무심무념이라고 하였다. 즉, 선은 무심일도(無心一道)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화두를 버릴 것을 강조하였다. 여주 혜목산 취암사(鷲巖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이르는 곳이 모두 돌 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인 〈백운화상어록〉은 전에 없이 통쾌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된다. 특히 하권에 실려 있는 시들은 기발한 표현으로 고정관념을 깨고자 했다. 원에 다녀왔지만 왕후장상을 상대로 설법하지 않았으므로 고려시대 고승 가운데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이 발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직지심체요절은 1372년(공민왕 21) 백운화상 경한(1299~1375)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법어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상·하 2권으로 이루어졌다.